64. 내가 나를 다시 믿기 시작한 날

by 하린

처음 정신과를 방문했을 때,

정말 많은 설문지를 작성했다.

이름, 증상, 가족력, 수면 습관, 감정 기복…


손은 떨렸고, 마음은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원진료실 문이 열렸고,

그 안엔 한 명의 의사가 있었다.


강세은 원장님.

세련된 이미지에,

참 포근한 인상을 가진 여자 선생님이었다.

나는 선생님을 보자마자—

눈물이 났다.

참을 수 없었다.

울음이 터졌다.


‘이제 나, 진짜 나을 수 있겠지?’

그 생각 하나가 온몸을 흔들었다.

선생님은 마치,

나를 지켜주러 온 사람 같았다.

구세주처럼 보였다.


울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화를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선생님은

부드럽게 말을 건네며

내 안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주었다.


나는 천천히

내가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꺼냈다.

그리고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울증이 뚜렷하게 시작된 건 12년 전인 것 같아요.

다은 씨가 25살이던 그때쯤.

왜 그때는 진작 병원에 와볼 생각을 못 하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다시 눈물을 쏟았다.

그 한 문장이

내 안의 시간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렇게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나는 내 아빠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의 부재.

그 이야기를 하면서

또 많이 울었다.


선생님은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어린 시절 부모의 결핍을 겪은 아이들은

우울증에 노출될 확률이 훨씬 높아요.

다은 씨는 그런 경우인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나는

처음으로

내 안에서 무언가가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약한 게 아니었구나.’

‘내가 나태해서 그런 게 아니었구나.’


나는 20대 초반,

연장근무도, 조출도, 특근도 다 지원하며

몇 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악착같이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던 내가

나약한 사람일 리 없었다.


나는 그냥—

무너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날,

선생님의 말은

내가 나를 다시 믿기 시작하게 만든

첫 번째 문장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기쁨과 안도의 눈물.

“이제는 정말 괜찮아질 수 있겠구나.”

그 믿음이

처음으로 내 안에 들어온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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