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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현대디자인사 #5. 기능주의(Functionalism)

by 공일공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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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을 정리하는 단 하나의 문장 “Form follows function.

이 짧은 문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 고층건물이 막 솟기 시작하던 미국 시카고였다.

당시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Louis Sullivan)은 말했다.

“건물은 장식이 아니라, 쓰임이 먼저다.”

이 선언은 단지 건축을 바꾼 것이 아니라, 이후 100년간 디자인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출발점이 되었다.




필요하지 않다면 넣지 않는다.


기능주의가 말하는 “기능”은 단순한 실용성을 넘는다. ‘무언가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 철학은 당시 산업화된 도시에서 더욱 명확해졌다. 강한 구조, 반복되는 창, 수직으로 뻗은 형태. 건물과 사물은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형태만 남겼다.


반대로 말하면, “이유 없는 장식은 죄악이다."

1db5f2f2bae02.png (Le Corbusier, Villa Savoye (1929–31))

→ 구조·공간·비례를 기능으로 환원한 국제주의 양식.




보편적 디자인 언어의 탄생


기능주의는 단순히 ‘덜어내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읽을 수 있는 보편적 시각 체계를 만들려는 시도였다.


이 정신은 이후 디자인 전체로 퍼졌다:


명확한 그리드

반복 가능한 비례

기능 중심의 아이콘

형태와 목적의 일치

규칙 기반의 시각 시스템


오늘날 브랜드 가이드라인, UI 디자인 시스템, 공공 사인 시스템의 근간이 모두 기능주의의 정신에서 시작되었다.


“보편성을 확보하면, 사용자는 고민 없이 이해한다.” 기능주의는 디자인을 ‘개인이 해독해야 하는 예술’에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바꿔놓았다.

2f2d175e70cc2.png Air Force Pictogram – iF Design Award

→ 복잡한 정보를 한 줄의 선으로 환원한, 기능주의 이후 디자인 언어의 진화.




정직성의 미학 — 거짓말하지 않는 형태


불필요한 장식을 제거했다면, 기능주의 디자이너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재료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정직한 디자인’이라 여겼다.


금속은 금속처럼, 유리는 유리답게, 목재는 나뭇결 그대로. 기능을 속이는 장식은 ‘재료에 대한 기만’이라고 비판했다.


이 철학은 건축·가구·제품 디자인의 기본 언어가 되었고 브루탈리즘,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으로 이어져 ‘있는 그대로의 미학’을 만들었다.

33696f8a1cec4.png Brutalist Architecture–Inspired Coffee Machine – Architecture & Design

→ 재료의 질감과 구조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브루탈리즘’의 미학.




기능이 만든 아름다움


기능주의는 우연히 단순해진 것이 아니다. 단순함 자체가 목표였던 미니멀리즘과도 다르다. 기능주의는 하나의 논리를 따른다.


사용자가 먼저다.

목적이 형태를 만든다.

구조는 솔직해야 한다.

합리성은 미학이 될 수 있다.


이 논리는 건축을 넘어 가구, 인쇄물, 인터페이스, 시스템으로 확대되었다. 디자인의 중심은 ‘보여지는 것’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이동했다.




정보가 늘어나면서 기능은 더욱 중요해졌다


20세기 후반, 디지털 기술이 등장하면서 기능주의는 다시 속도를 얻는다.


복잡한 정보, 빠른 변화, 다중 인터페이스. 이 세계에서는 “장식”보다 “구조”가 더 큰 힘을 가진다.


그래서 스위스 디자이너들은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리드(Grid)라는 도구를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정보를 정리할수록 디자인은 단순해지고, 단순해질수록 기능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5b84b0ad02b42.png Swiss-Style Poster Series – Behance

→ 기능주의가 그래픽 디자인으로 확장된 대표 사례.




기능주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기능주의의 세계 속에 있다. 브랜딩, 앱 디자인, 웹 UI, 지하철 노선도, 제품 인터페이스까지. 모든 구조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건 왜 이 자리에 있어야 하지?”


그리고 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AI가 이미지를 쏟아내고, 자동화된 시스템이 레이아웃을 생성하는 시대이지만 — 디자인의 근본은 여전히 인간의 목적과 맥락을 읽는 일이다.


그 목적이 명확할수록 디자인의 형태는 자연스럽게 제 자리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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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형태를 만든다


기능주의는 단순히 장식을 배제하는 태도가 아니다. 디자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꾼 철학이다. 목적이 흐릿하면 형태는 혼란스러워지고, 목적이 선명하면 형태는 스스로 단단해진다.


결국 기능주의는 이렇게 말한다.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유행도, 취향도 아니다.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이유다.”


그리고 이 문장은 오늘의 디자이너에게도 변함없이 유효하다.
기능과 목적이라는 질문은 기술이 변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디자인은 복잡할수록 본질을 다시 요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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