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디자인사 #3. 구성주의(Constructivism)
1917년, 러시아는 혁명을 맞았다. 왕정은 무너지고, 새로운 사회가 세워졌다.
예술가들은 이제 ‘아름다움’을 위해 그리지 않았다. 그들에게 예술은 더 이상 현실에서 도피하는 상상의 공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을 재구성하는 도구, 새로운 사회를 위한 설계의 언어가 되어야 했다.
그들이 믿은 것은 감정이 아니라 구조였다. 형태는 이상을 표현하고, 색은 혁명의 리듬을 시각화하며, 예술가는 화가나 조각가가 아닌, 사회 시스템의 건설자(Builder)로 자리 잡았다.
이것이 바로 구성주의(Constructivism) 가 태어난 배경이다.
러시아의 젊은 예술가들은 더 이상 캔버스와 붓으로는 새 시대를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철, 유리, 나무, 산업 부품을 사용해 예술을 ‘건설’했다. 표현이 아니라 ‘구성’— 그림이 아니라 ‘구조’의 시대였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Tatlin)이다.
그의 대표작 <타틀린의 탑> (1919–20)은 러시아 혁명을 기념하는 거대한 나선형 철골 구조물이었다.
높이 400m, 유리와 철로 이루어진 그 탑은 “예술은 건축처럼, 사회의 이상을 물질로 세운다”는 믿음의 상징이었다.
비록 완성되지 못했지만, 그 도전은 예술의 목적을 ‘감상’에서 ‘기능’으로 옮긴 획기적인 선언이었다.
혁명 이후 예술가들의 호칭은 달라졌다. 그들은 스스로를 ‘예술가(artist)’가 아니라 ‘기술자(engineer)’ 라고 불렀다.
예술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사회를 효율적으로 조직하는 시스템이 되어야 했다.
알렉산드르 로드첸코(Alexander Rodchenko)는 회화 대신 포스터, 사진, 인쇄물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의 작품에는 대각선, 삼각형, 빨강과 검정의 강렬한 대비가 반복된다. 그것은 단순한 그래픽이 아니라, 혁명의 속도와 긴장감을 시각화한 언어였다.
“예술은 눈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작동해야 한다.”
로드첸코의 말처럼, 포스터는 거리에서 ‘움직이는 선언문’이 되었다. 이후 그의 실험은 현대 그래픽디자인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구성주의는 곧 건축과 산업디자인으로 영역을 넓혔다.
예술의 목적이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다면, 구성주의의 목적은 사회를 시각적으로 조직하는 데 있었다.
엘 리시츠키(El Lissitzky)는 인쇄와 건축의 경계를 넘나들며 ‘Proun(프로운)’ 시리즈를 제작했다.
그는 평면 위에서 입체 공간의 구조를 탐구했고, 이 작업은 훗날 바우하우스, 디 스틸, 모더니즘 건축으로 이어졌다.
리시츠키는 말했다. “우리는 예술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한다.” 그의 작업은 형태와 공간,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재정의했다.
‘예술은 삶을 위한 실험실’이라는 이 개념은 이후 수십 년간 모든 디자인 교육의 근간이 된다.
그러나 구성주의의 실험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0년대 중반, 소련 정부는 ‘대중에게 난해한 예술’을 금지하며 사회주의 사실주의를 공식 예술로 지정했다.
기계와 구조로 사회를 꿈꾸던 예술가들은 ‘비실용적’이라는 이유로 배척됐다. 타틀린의 탑은 건설되지 않았고, 로드첸코와 리시츠키의 작업은 정치적 검열 아래 묻혔다. 하지만 그들의 실험은 이미 세계로 퍼져나가 있었다.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의 디자이너들은 구성주의의 논리를 이어받아 ‘모더니즘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언어를 만들었다.
기하학적 질서, 산업적 재료, 기능 중심의 사고 — 이 세 가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디자인의 기본 원칙으로 남아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단순하고 명료한 디자인”, 그 출발점이 바로 구성주의였다.
그들의 예술은 감정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물이었다. 즉, 아름다움이란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만드는 과정 속의 질서였다.
“예술은 세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이 문장은 지금의 디자이너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의 디자이너는 화면이 아닌 시스템 위에서 작업한다. 이미지는 자동으로 생성되고, 색의 조합은 알고리즘이 제안한다. 우리가 누르는 단 하나의 버튼 뒤에는 수천 개의 연산이 작동한다.
그럴수록 묻게 된다 — 창작이란, 여전히 인간의 일일까?
100년 전 구성주의자들은 기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계를 거부하기보다, 기계와 함께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했다. 형태를 단순히 꾸미는 일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를 다시 짜는 일로 보았던 것이다.
그들에게 ‘디자인’은 하나의 직업이 아니라, 세상을 새로 짓는 언어였다.
오늘의 기술은 더 정교해졌지만, 질문은 여전히 같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형태를 만드는가?”
속도와 효율이 아니라, 의미와 감각의 균형을 세우는 일.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할 구성주의의 태도다.
디자인은 결국, 세상을 다시 구성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언제나 인간의 감각 — 사유하고 느끼는 그 ‘손’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