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아가고, 말이 많아졌다〉 4년간 상담실에서 마주한 감정언어
'그래 Gorgeous! 이거지. 잘생긴 게 최고야.'
아침 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키 184cm에 몸무게 90kg, 헬스에 빠져 사는 탄탄한 몸, 구릿빛 피부에 각이 진 턱선과 콧대. 깔끔하게 포마드를 바른 머리 스타일.
요즘처럼 바디 프로필이 흔한 시대에도 그는 보기 드물게 조화로운 비율을 가진 미남형이었다. 부드러운 미소년 느낌보다는 선이 굵고 강한 남자 느낌에 가까웠다.
그는 전부터 알던 사람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개로 몇 번 만났던 적이 있었다.
재미없는 연락과 딱딱한 성격에 매력을 못 느꼈고,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던 사이였다.
시간이 흐른 뒤, 어느 날 갑자기 내 생일에 맞춰 기프티콘을 보내며 “제대로 만나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그때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기에 조용히 거절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시점에 다시 시작되고 말았다.
이번엔 흐르기 위해,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흐르는 대로 맡겨 보기로 했다.
전 연애(延 碍)에서 채워지지 않았던 이성적 매력에 대한 갈증이 반사작용처럼 그에게 이끌었다.
그는 외모 관리에 진심이었다.
영양제, 단백질 파우더, 거울 앞에서의 근육 확인, 그리고 꼬박꼬박 챙기는 피부 팩.
열심히 피부 관리를 하며 화장품 성분에 대해 설명했다.
“AHA, BHA 성분이 들어간 피부과용 로션인데, 난 요즘 이거만 써.”
그리고 어느 날, 드라마 속 잘생긴 배우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와, 잘생겼어. 질투 나서 눈 찌르고 싶다. 저런 애들 없어져야 해.”
잘생긴 남자에게 질투를 느낀다는 표현이었고, 그의 말은 낯설고 당혹스러웠다.
세상에 자기만 잘 생긴 남자로 남고 싶단 말인가
그는 정확한 시계추 같았다.
규칙적이고 규율에 따라 살아갔다. 부지런하고 꽤 건설적인 것 같았다. 정해진 시간에 헬스장을 가고, 대학원 수업을 듣고, 부동산 투자 임장을 했다. 밤 9시면 기절하듯 잠들었고, 종종 예고 없이 연락이 끊겼다.
그 시간표 어딘가에, 나는 끼워져 있었다. 할당된 시간에, 규칙적으로 만나는 존재.
그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었다.
태도에서 자연스레 자신감이 묻어났고, 그 우월감에 묘하게 끌렸다
처음 사귀기 시작할 무렵 그는 말했다.
“지금까지 먼저 사귀자고 말하고 연애한 적 없어. 자연스럽게 만났고, 여자들이 먼저 좋다고 했어.”
자신감인지, 자서전인지 헷갈렸다.
그 말에 답답해진 나는 결국, 우리가 정식으로 사귀는 게 맞냐고 물으며 관계를 시작했다.
평생 이런 태도로 대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기가 찼다.
보이지 않는 관계의 주도권은 어느 순간 그가 먼저 선점했고, 나는 따라가고 있었다.
그는 프로그래밍된 로봇 같았다.
사고 중심적으로 발달된 사람이었다. 3형제-남중–남고–공대–직업군인의 남자로만 둘러싸인 ‘순수 남성 생태계’에서 살아온 배경.
정확한 input을 넣으면 그에 따른 output이 나오는 사람 같았다.
단, 감정을 input 하면...
“Error 404 감정 not found.”
그에겐 ‘공감 모듈’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감정이나 감성의 언어는 거의 통하지 않았고, 답답함이 쌓여갔다.
감정적으로 가까워지려 하면 그는 미끄러지듯 거리를 뒀다.
긴장감이 감도는 올림픽 펜싱 경기 같았다. 그에게 다가가면, 그는 한 발 물러섰다.
감정적 연결은 삐걱거리는 로봇처럼 늘 어려웠다. 아니다, 요즘엔 챗 GPT가 훨씬 낫다.
불안했다. 말로만 듣던 회피형 애착의 짙은 패턴.
그제야 알았다. 내가 그렇게 무던한 사람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내 안에도, 처음 보는 나의 모습, 불안이라는 이름의 붉은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났다.
이성적 매력은 충분했지만, 그의 회피는 우사인볼트 같이 재빨랐다.
그때는 몰랐다. 누군가 나를 회피하는 태도로 대할 때, 그 공백을 메꾸려는,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을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게 그와의 만남은 계속되는데...
누군가의 ‘회피’를 내 쪽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착각했던 적, 당신도 혹시... 있었던가요?
〈나를 알고, 말이 많아졌다〉 시리즈는 상담실에서 마주한 감정의 조각들을 꺼내어 쓰는 기록입니다.
연애, 자아, 가족, 군대—삶의 여러 장면 속 감정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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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 《 06 회피형과의 여름: 감정도 잠수된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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