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아가고, 말이 많아졌다> 4년간 상담실에서 마주한 감정 언어
앞서 묘사했듯, 그는 회피 성향이 강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웠던 건 감정이 엇갈려도, 그를 쉽게 놓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랑이 아니라, 조급함이 그를 붙들고 있었다.
그에게 건네는 몇몇 요구에는 타협이 없었다.
“우리 만나는 거, 며칠 전에 미리 정하면 좋겠어. 그래야 나도 다른 일정 조율하기 쉬울 것 같아.”
“싫어. 어차피 주말에 보잖아. 그렇게 미리 정하는 거, 부담스러워.”
사소한 것도 조율되지 않았고, 감정적으로 깊은 대화를 시도하면 그는 대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자주 사라졌고, 문제는 미해결 사건으로 남았고,
대화의 끝에는 혼자 남았다.
그렇게 반복되는 단절 속에서도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건,
잃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그에게 투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연애를 한 줄 알았지만, 사실 내 불안과 사귀고 있었다.
결국 어느 여름날, 그는 예고 없이 연락을 끊고 며칠 동안 잠수를 탔다.
그 시기는 하필 로스쿨 시험 날이었다. 하지만, 심경이 어지러워 차마 시험을 보러 갈 수 없었다.
그가 대학원 성적을 잘 받았다고 자랑하던 모습과 대조적이다.
그리고 내 생일이었다. 그의 생일엔 랍스터와 양갈비로 식탁을 정성껏 차려줬지만,
내 생일엔 그는 없었다. 게다가 웬 말이냐. 코로나에 걸려 격리되었고, 해열제를 씹으며 마음을 달랬다.
홍수로 서울 일대가 잠긴 장마철, 그를 불러냈다.
얼굴 보고 헤어지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내 마음도 편할 것 같았다.
그는 직접 얼굴을 보고 이별을 말하는 게 무서웠다고 한다.
카톡 한 통으로 끝내려 했다고 한다.
예전에 사귀던 여자가 길거리에서 울며 불며 자기를 원망하던 게 트라우마였다고 한다.
나도 그럴까 봐 무서웠다고 말했다.
몇 살 연하였던, 테스토스테론 넘치는 184cm, 90kg 근육질의 자칭 멋진 사나이.
그런데 그 근육은 감정을 감당하려고 키운 건 아니었다.
정서적으로는 회피성 애착 스타일의 교과서였고,
관계에서 감정을 마주해야 할 땐,
100m 기록 단축에 진심인 단거리 도망 전문가로 변신했다.
문제는 - 본인은 자기가 그렇게 도망치는 줄도 모른다는 거.
아마 감정의 출발선조차 본 적 없었을지도.
그와의 연애는 짧고도 긴 8개월 만에 끝났다.
직전 만남에서 채워지지 않았던 이성적 매력은 충족됐지만, 정서적 공허감은 오히려 더 깊었다.
헤어지니 삶이 좀 더 밝아졌다. 마음이 가벼웠다.
불안의 늪에서 빠져나와 숨을 쉴 수 있었다.
한동안은 그가 미웠다. 그래도 바쁘게 생활을 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취미 생활을 했다.
어리지 않은 나이에 이런 사람을 처음 만나본 자신이 새삼스러웠다. 나에게 진심이었던 여러 사람들에게 때론 도망치고 상처 줬던 것 같아 미안했다.
그리고 나를 잘 아는 친구가 말했다.
‘또 그런 사람 만나면? 우사인볼트처럼 튀어. 풀 스프린트로. 근육통 와도 뛰어! 뒤돌아보지 말고.’
처음에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급히 그에게 끌렸던 이유는 내 안의 조급함 때문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서른 즈음의 여성이 겪는 무의식적이고 의식적인 결혼 압박.
그리고 ‘착한 딸’이어야 한다는 오랜 틀. 한 소리씩 들을 때마다 불안감이 나를 감쌌다.
나도 모르게 ‘나 아직 괜찮은 사람 맞지?’ 하고 스스로를 점검하고 있었다.
상대를 알아가기보단, 내 불안을 덜어줄 존재를 찾듯 그를 붙잡았다.
판단이 아니라 충동이었다.
그리고 그 갈구가 눈에 안대를 씌웠다.
잘생긴 외모에 이끌려 시작된 연애. 하지만 감정은 늘 엇갈렸고, 정서적 고립 속에서 불안과 조급함만 또렷해졌다.
연애를 했지만, 실은 셋이 함께하고 있었다.
나, 그, 그리고 내 안의 조급함.
다음 글에서는, 내가 반복해서 끌렸던 사람들, 자기애로 반짝이던 그들에 대해 써본다.
그 반짝임에 왜 자꾸 마음이 갔을까—그 안에 무엇이 있었기에.
<나를 알고, 말이 많아졌다> 시리즈는 상담실에서 마주한 감정의 조각들을 꺼내어 쓰는 기록입니다.
연애, 자아, 가족, 군대—삶의 여러 장면 속 감정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다음 편: 《 나르시시스트들이 섹시하다고 느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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