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마가 떠난 뒤, 고시원의 공기는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식당에서 풍겨오는 라면냄새와, 같은 시간에 돌아가고 있는 세탁기는 여전했지만 이상하게도 예전처럼 무겁지 않았다.
수연은 책상 위에 원고지를 펼쳤다. 그 위로 델마가 두고 간 하얀 수건이 걸려 있었다. 세탁기에서 막 꺼낸 것처럼 보드라웠다.
벽에는 깔끔하게 잘린 신문 조각이 붙어 있었다.
'2003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응모작 모집.'
몇달 전, 고시원 현관 옆에 버려진 신문에서 오린 거였다.
그때만 해도 자신은 도전할 수 없는 벽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종이 가장자리가 살짝 말려들며 고시원의 바람결에 흔들릴 때마다, 그 흔들림이 이상하게 마음을 두드렸다.
수연은 펜을 들었다. 오랜만에 글을 시작했다. 제목을 쓰며 입안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버지의 손>."
문장은 의외로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1994년 겨울, 공장에서 철판 기계가 아버지의 손을 삼켜버리던 순간을 첫 문장으로 적었다.
기름 냄새와 금속의 울음, 굉음 속에서 비명만이 아버지를 돕던 그날.
그 뒤를 이은 문장은 아버지가 한 손으로 밥을 먹고, 그 손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던 날들이었다.
"한쪽 손을 잃은 사람은 그 남은 손으로 밥을 먹고, 머리를 감고, 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손의 굳은살이 내 인생의 문장 첫 줄이었다."
펜이 종이 위를 미끄러질수록, 눌려 있던 시간이 천천히 풀렸다.
글을 쓰며 맺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지만, 그래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병원에서 보았던 아버지의 굽은 어깨, 귤을 모아두던 손, 그리고 "글은 손가락이 아니라 가슴에서 나온다"던 그 말이 불쑥 떠올랐다.
그 말이 결국, 자신을 다시 이 자리로 데려왔다는 걸 수연은 알았다.
그날 밤, 원고지를 덮으며 수연은 창문 밖을 바라봤다.
델마가 떠난 옥상 빨랫줄에는 여전히 수건 하나가 펄럭이고 있었다.
그 수건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마치 누군가 "괜찮아, 이제 네 차례야"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며칠 후, 병원.
아버지는 점심 식사를 금세 비우고는 깊게 잠들었다. 부쩍 늘어난 식사량을 따라 좋아진 아버지의 얼굴에서 홍조가 피어올랐다. 수연은 병실 한쪽 의자에 앉아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 안에는 정성껏 쓴 원고봉투가 들어 있었다.
봉투 앞면엔 꾹 눌러쓴 단정한 글씨로 '신춘문예 응모작 / 서울일보 문화부 귀중'이라 적혀 있었다.
봉투 끝을 매만지며 숨을 고르자, 손끝이 살짝 떨렸다.
시계는 오후 두 시. 병실 안엔 라디오 소리와 일정한 호흡음이 뒤섞여 있었다. 수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병원을 나섰다.
병원 앞 골목에는 분식집과 문구점, 그리고 우체국이 나란히 있었다. 우체국 유리문에는 '4시 마감'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그 문구가 마치 자신에게 시간을 재촉하는 듯했다.
수연은 천천히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안에는 공과금을 내러 온 동네 어르신 몇 명이 줄을 서 있었다.
창구 너머 직원이 물었다.
"소포요? 등기요?"
"빠른 등기로요."
"주소 한번 확인할게요. 서울일보 문화부, 신춘문예 응모작 맞으시죠?"
"네, 맞아요.”
직원은 영수증을 건네며 도장을 찍었다.
'탁'하는 도장 소리가 유리벽에 맺혀 퍼졌다.
"이거 잘 가겠죠?" 하고 묻자, 직원이 대답했다.
"그럼요. 건투를 빌게요."
수연은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가방 안에서 신문 조각이 살짝 튀어나왔다. 그녀는 손끝으로 그것을 눌러 넣었다.
우체국을 나오자 오후의 햇살이 눈부셨다. 멀리서 버스가 지나가고, 전신주에 붙들린 현수막이 흔들렸다. 길가의 철제 울타리에는 색이 조금 바랜 와이셔츠와 어린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티셔츠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아버지는 잘 주무시고 계시려나."
목소리가 햇빛에 닿아 부서졌다. 그녀는 가방을 메고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불어왔다. 원고지를 쓸 때의 잉크 냄새가 아직 손끝에 남아 있었다.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 하늘은 이상하게 맑았다. 어디선가 누군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그녀의 발걸음도 조금은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