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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연가(11화) 뜨거운 물은 뜨겁고도 차갑다.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한명만 있어도 그건 성공한 인생이다.

by 해이






수연은 계단에 앉은 채로 울지 않으려 했지만,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은 막을 길이 없었다.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려다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새벽 아르바이트로 흘러가던 시간들이 몸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 몸은 이제 더 이상 버텨줄 여력이 없었다. 손끝으로 벽을 짚었지만, 먼지와 냄새만 묻어났다. 그마저도 왠지 사람 냄새 같아서, 괜히 더 울고 싶어졌다.


아버지는 딸을 못 알아봤다. 때로는 간호사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때로는 죽은 엄마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다 어떤 날엔 눈빛이 또렷해지며 말했다.


"니, 글 쓴다 했지. 꼭 써라. 글은 손가락에서 안 나온다. 가슴에서 나온다."


그 말을 듣은 수연은 숨이 막혔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버지는 다시 흐려졌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 한마디가 얼마나 잔인했는지 모른다. 고시원으로 돌아와 문 앞에 섰을 때,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문고리를 잡을 수도, 위로 올라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계단에 주저앉았다. 이불이 기다리는 방보다 낡은 계단이 오히려 덜 외로워 보였다. 한숨이 길게 흘렀다. 그 한숨 속엔 피로와 미움과 체념이 다 섞여 있었다. 수연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지만 눈물은 손등을 적셨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울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



그때 현관문이 덜컥 열렸다. 술 냄새와 향수 냄새, 그리고 차가운 새벽 공기가 한꺼번에 들어왔다. 델마였다. 오늘은 평소보다 걸음이 느렸다. 누가 봐도 진상 손님 하나가 있었고, 그 말을 삼켜야만 했던 얼굴이었다. 그녀는 하이힐을 벗다가 계단에 걸터앉은 그림자를 봤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다가갔다.


"거기서 얼어 있지 말고, 일어나요."

"괜찮아요. 그냥..."

"괜찮았으면 거기 앉아 있지 않았겠죠. 일어나요."


수연은 몸을 일으키려다 그대로 델마의 손에 이끌렸다.


"어디 가요?"

"목욕탕."

"이 시간에요?"

"이 시간이라 좋아요. 사람이 거의 없거든."


그렇게 두 여자는 말없이 골목을 걸었다. 새벽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껍질 벗긴 귤처럼 쓴 냄새가 섞인 서울의 겨울 냄새였다. 둘 다 지쳐 있었지만 이상하게 발걸음은 가벼웠다. 누군가에게 이끌려 걷는 길은 혼자 걷는 길보다 덜 추웠다.



목욕탕 문을 여는 순간 김이 얼굴을 덮쳤다. 세상의 냉기가 문 밖으로 밀려나갔다. 수증기와 비누 냄새가 뒤섞인 공간, 여기서만큼은 누구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수연이 옷을 벗다 허벅지의 자국을 덮으려 하자 델마가 잠시 멈춰 서서 물었다.


"오래된 상처같은데 왜 생긴건지 물어봐도 돼요?."

"네. 아버지가 끓는 냄비에 손을 넣으려던 걸 내가 말리다 쏟았어요."


말을 끝내는 순간 손끝이 떨렸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가 조금씩 정신을 놨어요. 나는 어떻게든 붙잡아보려 했는데 자꾸 손에서 빠져나갔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너무 미웠어요. 너무... 미워서 아버지 이름만 들어도 몸이 떨렸어요.”


델마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타올을 적셔 비누거품을 내고 수연의 등을 천천히 문질렀다. 거품이 흘러내리며 톡톡 터지며 흩어졌다. 그 소리가 마치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근데요, 미워하는 것도 다 끝나면 남는 게 있나 봐요. 그냥... 빈자리 같은 거요. 이제는 울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울게돼요."


델마가 물을 떠서 수연의 어깨 위로 부었다. 뜨거운 물이 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순간 수연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이건 참는 게 아니라 드디어 울음이 되는 몸짓이었다. 물과 눈물이 뒤섞여 흘렀다. 욕탕의 김이 두 사람을 덮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고, 누구도 위로하지 않았다. 그저 물이 그 역할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서 수연은 냉장고에서 바나나우유 두 병을 꺼냈다. 계산대 위에 동전을 올리고 하나를 델마에게 내밀었다.


"오늘, 감사했어요."

"난 아무것도 안 했어요."

"밖으로 끌어내줬잖아요."

"그럼 반반이네. 나도 덕분에 씻었으니까."


두 사람은 목욕탕 문 앞 계단에 나란히 앉아 우유를 마셨다. 김이 식고 공기가 다시 차가워졌다. 수연이 말했다.


"이상하죠. 뜨거운 데 있었는데, 시원해요."


델마는 웃었다.


"뜨거워야 식을 수 있잖아요. 사람 마음도 그래요. 뜨겁게 데워져야, 그다음에야 식을 자리가 생겨요."


그 말에 수연은 오랜만에 웃었다. 삐걱거리긴 했지만, 진짜 웃음이었다.



며칠 뒤, 델마는 캐리어를 끌고 복도 끝에 섰다. 총무가 물었다.


"언니, 진짜 내려가요?"

"응. 이제 가야지. 오래 있으면 사람도 썩어버리거든."


델마는 먼저 김차장의 방을 두드렸다.


"차장님, 딸 있잖아요. 한 번 봐요. 밥이라도 같이 먹어요. 세상 다 끝난 것 같을 때, 그 애 얼굴 보면 아직 안 끝났다는 걸 알 수도 있으니까."


그녀는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월급 받았어요. 곧 스무 살 되는 애들이 이런 색 좋아한대요. 그 애한테 주세요."


그리고 라흐만 방 앞에 멈춰 섰다.

"이거, 방글라데시에 계신 엄마한테 보내요. 비싼 건 아닌데 좋아하실 것 같아서 사봤어."

"고맙습니다."

"참치김치찌개 먹고 싶으면 놀러와도 돼?"

"돼요."

"그럼 됐네. 언젠가 또 봐."


복도 끝에서 문을 닫을 때 델마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 웃음엔 슬픔도 미련도 없었다. 단지 따뜻함만 남아있었다.



시외버스터미널. 델마는 공중전화에 동전을 넣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희숙이냐?"

"엄마."

"왜?"

"잡채랑 겉절이 먹고 싶어. 저녁반찬으로 해줄 거죠?"

"그래, 해줄게."

"거짓말하지 말고요. 이번엔 진짜 해줘요."

"알았다니까, 어서와."


델마는 고개를 숙였다.


"엄마... 나 지금 가."


버스가 출발했다. 창밖으로 서울의 불빛이 멀어졌다. 그녀는 낮게 흥얼거렸다.


"흠흠흠- 흐음- 흠흠으흠음-"


이번에도 노래를 끝까지 부르지 않았다. 끝을 남겨두어야 다음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 시각, 204호. 수연은 원고지에 마지막 문장을 써내려갔다.


누군가 계단에서 울고 있을 때, 그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한다.


마침표를 찍는 순간 복도 어딘가에서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유난히 따뜻하게 들렸다. 겨울은 여전히 길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덜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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