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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연가(10화) 302호, 어제와 같은 오늘입니다.

데자뷰

by 해이




새벽 다섯 시, 김차장은 눈을 떴다.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천장의 얼룩은 여전했고, 작게나마 있는 창문 틈으로 새어들어오는 새벽의 빛은 새로운 아침을 알리는 데 이미 충분했다.

그는 잠시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기지개를 켜듯 이불을 밀어냈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치며 파고들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허리를 펴고, 습관처럼 양말부터 찾았다. 늘 그렇듯 침대 밑으로 굴러가 있었다.
그는 괜히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오늘이 도대체 어제야, 오늘이야?..."


손끝이 찬 바닥을 스치며, 이불 아래로 숨어 있던 먼지가 공중에 흩날렸다.
구석에서 곰팡내가 올라왔다. 벽에 붙은 달력은 지난달에 멈춰 있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풍경, 매일이 같아서 지겨운데도 그는 여전히 그 하루를 살아야 했다.




신림9동 언덕 끝 인력시장.
어김없이 사람들은 새벽을 깨웠다.
"두 명 더!"라는 외침이 골목을 울렸고, 김차장은 낡은 면장갑을 낀 손을 들어 보였다.
그 장갑 속에는 굳은살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트럭에 올라타며 그는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한때는 이런 새벽에 커피잔을 들고 출근하던 사람이었다.
한부그룹 영업팀 과장.
그 이름으로 20년을 버텼고, 명함 속 직함을 자존심 삼아 살았다.
하지만 IMF는 사람의 인생을 숫자로 바꿔버렸다.
'명예퇴직'이라는 말로 포장된 해고 통보를 받던 날, 그는 처음으로 인생이 철판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그 후로 그는 이 일, 저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배달, 경비, 공장, 그리고 지금의 일용직 건설노동자.

"하루라도 쉬면 밥이 없으니까."


그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이야말로 세상에 맞서는 유일한 무기였다.




현장은 언제나 시끌한 소음으로 가득했다.
철판이 부딪히는 소리, 망치의 울림, 그리고 용접봉 끝에서 튀는 불꽃들이 매캐한 연기와 함께 피어올랐다.
김차장은 용접헬멧 속에서 땀을 훔치며 불꽃을 바라봤다.
이 불빛은 그에겐 이미 익숙한 빛이었다.
군 시절, 공관 용접병으로 복무하던 시절부터 손에 익었던 동작이었다.
그때는 그 불꽃이 일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생존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김차장님, 저기 마감 좀 부탁드릴게요!"


누군가의 외침에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몸을 숙였다.
용접봉 끝에서 번쩍이는 불이 얼굴 가까이서 튀었지만, 그는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머리숱이 성기게 남은 정수리에 땀이 맺히고, 그 땀방울이 천천히 쇠판 위로 떨어졌다.
불빛이 그 위를 스치며 번쩍였다.




점심 도시락을 열자 김치볶음밥, 달걀프라이 한 개, 깍두기 다섯 개.
어제랑 똑같은 구성에 그는 피식 웃었다.

"이게 바로 데자뷰지 뭐."


옆자리의 젊은 노동자가 물었다.

"차장님, 요즘도 공부하세요?"
"응, 해야지. 기계도 가만두면 녹슬잖아. 사람도 마찬가지야."


그 말은 가볍게 들렸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붙잡는 다짐이었다.




고시원은 늘 같은 풍경을 안고 밤을 맞이했다.
바닥은 늘 눅눅했고, 식당 불빛은 희미했다.
그는 냉장고를 열었다. 밥 한 덩이와 김치 몇 조각뿐이었다.
그때 301호 문이 열리며 라흐만이 얼굴을 내밀었다.


"형님,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라흐만 찌개 끓였습니다. 같이 드시겠습니까?"
"찌개?"
"예, 참치김치찌개입니다. 돼지고기 대신 참치 넣었습니다.
라면스프도 조금 넣었습니다. 맛있습니다."


그는 피식 웃으며 식탁에 앉았다.

"라면스프라... 그건 한국의 마법이지."


김차장은 국물을 한 숟갈 떴다. 뜨거운 김이 얼굴을 감싸며 코끝을 찔렀다.

"맛있네. 오늘도."

라흐만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식당에서 배웠습니다. 한국사람은 라면스프 좋아합니다."
"그렇지, 맞는 말이야."


둘은 동시에 웃었다.
그 웃음이 싸늘하던 식당 공기를 데웠다.


"형님, 행복하십니까?"


그의 질문은 어눌했지만 진심이었다.
김차장은 잠시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그래. 오늘은 좀 그런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김차장은 창문을 열었다.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는 새마을금고 아가씨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불빛에 비친 연기 속에서 그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늦은 시간인데 안주무셨어요?"
"그냥... 오늘따라 잠이 안 와서 올라왔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내려왔다.

"오늘따라요? 어제도, 오늘도. 하루가 다 똑같지 않아요?"

그는 웃었다.

"그렇죠. 그래도 내일은 조금 다를지도 모릅니다."
"왜요?"
"저 요즘... 공부하거든요. 자격증 따보려고 합니다. 용접."
"이 나이에요?"
"이 나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짧게 웃더니 연기를 내뿜었다.

"멋있네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쥔 담배를 보았다.
연기가 위로 피어올라 사라지는 걸 보며 중얼거렸다.

"멋있다는 말, 참 오랜만이네."




그날 밤, 형광등 불빛 아래, 그는 책상 앞에 앉았다.
"산업용접기능사 필기", 청계천까지 찾아가 구해온 중고 참고서였다.
종이 냄새와 싸구려 볼펜 냄새가 섞였다.
그는 듬성듬성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책을 얼굴 가까이 당겼다.
노안이 와서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줄, 한 단어라도 외우려 애썼다.


"이산화탄소 용접... 피복 아크 용접..."


중얼거리며 읽다가 눈을 비볐다. 눈이 침침했고, 머리는 멍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녹슬지는 말자.'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볼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작게 방 안을 메웠다.

그는 얼마전에 써두었던 이력서를 펼쳤다.
한쪽 귀퉁이에 적혀 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허리 튼튼합니다. 잡일 가능합니다.'


그는 그 밑에 놓아둔 응시요강을 펼쳤다.
제목 위에는 '2003년도 국가기술자격검정 응시원서'라는 글씨가 굵게 박혀 있었다.
왼쪽 상단에는 '응시종목', 그 밑엔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가 줄줄이 박혀 있었다.

김차장은 잠시 펜을 쥔 손을 멈추었다.
오랜만에 써보는 자신의 이름이었다.
늘 인력시장 명부에는 "김차장"이라 적혔고, 현장에서도 비슷하게 불렸다.
누군가의 이름이 아니라, 역할로만 존재하던 세월이었다.

그는 잠시 숨을 크게 내쉬고, 또박또박 글씨를 써 내려갔다.

응시종목: 산업용접기능사
성명: 김동식
주소: 서울시 관악구 신림9동
전화번호: 없음

'없음'이라는 글자를 쓰는 순간, 괜히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휴대폰은 있었지만, 미납으로 며칠째 꺼져 있었다.
잠시 멍하니 펜 끝을 바라보다, 그는 뒷장 구석의 '비고란'을 발견했다.


그는 펜을 다시 쥐었다. 볼펜 끝에서 잉크가 조금씩 번졌다. 그는 조심스레 적었다.


"늦었지만, 다시 배웁니다."


글씨는 삐뚤었고, 종이에는 손바닥의 땀이 번져 있었다.
그는 한참을 그 문장을 바라보다가, 무심히 웃었다.

"그래, 이것도 공부지."


책상 위에 작은 탁상전등이 희미하게 깜박였다.


밖은 아직 새벽이었다. 복도 끝에서 라흐만이 코를 고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김차장은 그 소리를 들으며, 응시원서를 접어 책 위에 얹었다.


창문 밖으로 하얀 빛이 아주 천천히 번졌다.
그는 그 빛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2003년 2월 26일... 그날엔 나도 다시, 어깨를 펼 수 있겠지.”


멀리서 새벽 두부리어카의 딸그랑 거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포근하게 들렸다.





데자뷰란 게 꼭 특별한 일은 아니다.
어제도, 그저께도 다르지 않은 오늘,
그게 인생이고, 데자뷰다.


하지만 똑같은 하루를 견디다 보면,
아주 가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변화가 생긴다.


김차장은 오늘도 고시원에서 눈을 떴지만,
창문으로 새어들어오는 불빛은 어제보다 조금 더 밝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직 배울 수 있고, 살아 있다는 게
새삼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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