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델마로 살기로 했다.
낮빛이 어중간하게 고시원 복도에 스며들던 토요일, 총무실 유리문 너머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멈춰 섰다. 문이 반쯤 열리고, 비닐봉지가 먼저 들어왔다. 김치 국물 자국이 빨갛게 번진 투명봉지, 아직 미지근한 잡채 냄새. 그리고 천천히, 엄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좀 보자."
오랜만에 가게 쉬는 날을 맞아 목욕탕을 가려던 델마는 문턱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엄마 손목에는 장바구니가 깊게 파고든 자국이 선명했다. 오래도록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총무실 안 조그만 창문 앞에 앉은 총무가 눈치를 보며 고개만 까딱했다. "어머니세요?"라는 입모양이 보였지만, 델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방으로 오르는 계단을 먼저 걸었고, 그 뒤를 엄마가 따랐다.
문이 닫히자, 좁은 방은 김치 냄새와 짙은 향수 냄새로 금세 포개졌다. 엄마는 비닐봉지를 조심스레 풀면서 익숙하게 방 한가운데 빈 공간을 만들었다. 젓가락을 찾아 봉지 속에 찔러 넣고, 바리바리 챙겨온 접시를 꺼내 김치를 담고, 잡채를 덜었다. 손이 빠르고, 침묵이 길었다.
"이거... 네가 좋아하던 그 잡채. 당면은 조금만.."
"먹기 싫어."
던지는 말투가 아니라,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엄마의 손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젓가락끝이 접시를 톡 건드리며 떨렸다. 델마는 벽에 기대 팔짱을 꼈다.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천장을 봤다. 형광등 불빛에 눈이 시렸다. 둘 사이의 공기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아주 오래전의 시간들로 매캐했다.
"너 파출소에서..."
"그 얘기 하러 왔어요?"
"아니다. 그냥... 네 얼굴 좀 보려고."
엄마의 대답은 단순했지만, 이 상황은 쉽게 믿기지 않았다. 파출소 형광등 아래에서 들은 목소리가 이렇게 가까이 들어오니, 오히려 더 낯설었다. 델마는 손목 위 금속 팔찌를 한 번 만졌다.
그때의 택시, 룸미러, 불쾌한 질문, 더러운 손놀림. 그리고 욕설. 경찰의 대수롭지 않은 눈빛.
"여자 혼자 밤길에 다니면 조심해야지."
벽 뒤에서 누군가 라면을 끓이는 소리가 났다.
엄마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네가 여기 있는지... 몰랐다. 아니, 대충은 알고 있었는데. 네가 싫어할까 싶어서..."
"그럼 몰랐던 걸로 해요."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
"해야죠."
둘은 잠깐 서로를 보지 않은 채, 방 안의 냄새들만 공유했다. 잡채의 간장향, 세제의 잔향, 립스틱과 클렌징크림 냄새, 밤새 묵은 먼지의 냄새까지. 어쩌면 이 방이 둘의 공통 언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엄마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때 한 말... 기억나지?"
그 한마디가 델마를 과거로 곧장 끌고 갔다.
운동장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체육 시간. 공을 차던 애들이 갑자기 델마 쪽으로 몰려왔다. 그리고는 입을 모아 외쳤다.
"니네 엄마 창녀라며?"
"밤마다 딴 데서 돈 번다던데?"
"니네 엄마가 우리 아빠한테 술 팔았다고, 우리 엄마가 너랑 놀지 말라했어."
한 녀석은 손가락으로 비아냥대며 이상한 몸짓까지 흉내 냈다. 델마의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숨이 막혔다. 발끝에서부터 심장이 뛰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아이들은 더 큰 소리로 웃었다. 선생님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날 이후로 델마는 학교 앞 문방구도 가지 않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은 피했다. 엄마가 밤마다 집을 비우고, 다음 날 피곤한 얼굴로 돌아오던 장면이 어린 마음에 고스란히 각인됐다. "나는 절대로 저런 얼굴로 살지 않겠다." 그 다짐이 아주 어릴 적부터 그녀의 심장을 꽉 쥐고 있었다.
"다 네 탓이다, 그랬잖아요."
델마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내가 태어나지만 않았으면 벌써 때려쳤다고, 내가 들었어요. 엄마가 내 얼굴 보고 말한 거잖아요. 그 일이 좋아서 한 줄 아냐고, 다 내 탓이라고 했잖아요. 내가 엄마 인생 망쳤다고 했잖아요!!!"
델마의 외침이 아주 오래전 밤의 기억을 불러냈다.
휘청거리며 돌아오던 엄마, 싸구려 술 냄새, 낡은 전등 아래 던져지던 몇 마디.
그 말들은 던져진 즉시 바닥에 부서졌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귀에 들어와 골격을 만들고, 살을 붙이고, 심지어 숨을 쉬었다. 아주 오래도록 그 문장들이 그녀의 등뼈를 잡아끌었다. "네 탓." 두 글자는 멍처럼 퍼져, 수없이 날짜를 지우는 동안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델마는 문득 입안을 꽉 물었다. 피맛이 났다.
엄마는 잠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손등에 오래된 굳은살이 도드라졌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아주 잠깐 미소 비슷한 것이 스쳤다.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에 가까웠다.
"그때 그 말은... 너한테 한 말이 아니라 나한테 던진 말이었다. 내가 나한테. 근데 가까이에 네가 있었으니까, 네가 맞았지. 그게 제일 미안하다."
"미안하단 말, 이제 와서요?"
"이제 와서라도."
엄마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문질렀다. 그 손등에 군데군데 생긴 얼룩과 굳은살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 그 손으로 밥숟가락 위에 갓 무친 잡채를 올려주던 장면이 겹쳐졌다. 잠깐, 방 안의 공기가 조금 느슨해졌다가, 곧 다시 팽팽해졌다.
"왜 왔어요?. 정말?."
"네가... 파출소에서, 이름을 다르게 썼다더라."
델마는 어깨를 세웠다. 조심스레 조준한 화살이 정확히 꽂힌 느낌이었다.
"그게 문제예요?"
"그게 마음에 걸린다."
"윤희숙. 그 이름을 쓰면, 자꾸 옛날의 내가 보여요. 내가 부려먹히던 때, 사람이 아닌 취급 받던 때, 그 말들이 다시 생각나요. 그 이름으로 불려지는 나는... 늘 미안해야 했고, 불편해야 했고, 없는 사람이어야 했어요."
"그러니까 델마."
"그래요. 비디오테이프로 빌려본 영화 한 편에서, 웃는 여자를 봤어요. 제대로 웃는 여자. 잘못도 하고, 무모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자기 얼굴로 웃더라고요. 나는... 내가 틀려도 되는 얼굴을 가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골랐어요. 델마. 내가 좀 더 똑똑하고, 똑부러졌었다면 루이스를 골랐겠지만, 난 그냥 웃고 싶었어. 편하고 싶었어."
엄마는 가만히 있었다. 방 바닥의 얼룩을 한참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이름으로 살아라."
델마는 그 말을 여러 번 속으로 되뇌었다. 몇 번의 계절치고는 과하게 긴 침묵이 지나가고 나서야, 목에서 어쩔 줄 모르는 숨소리가 빠져나왔다.
"이제 와서 그렇게 쉽게 말하면... 내가 바보 같잖아요."
"아니. 네가 바보였으면... 여기에 없다."
문장이 짧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엄마가 아무 말 없이 젓가락을 들어 김치를 한 조각 올려주었다. 델마는 보지 않은 척, 결국 그 접시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김치 국물이 접시 밖으로 번졌다. 빨간 자국이 방 바닥의 오래된 얼룩들과 겹쳐 새로운 모양을 만들었다.
"너도 힘들었지."
엄마가 말했다.
"밤마다. 어쩔 땐 새벽마다."
"힘들었죠. 근데... 누구 탓하긴 싫어요."
"그래서 넌 어쩔 생각이니?"
"후회... 하겠죠. 엄마 옆을 떠나온 걸. 그런데 그 후회는... 다음 달로 미루고 싶어요. 언젠가, 감당할 수 있을 때. 다음 달이 안되면 그 다음 달, 또 그 다음 달. 내가 감당할 힘이 있을 때쯤. 그때 후회할게요."
엄마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하고, 울음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표정.
"그래. 그렇게 해라. 대신, 너 자신한테 좀 잘해줘라. 잠, 밥, 그리고 좀 덜 미워하기."
둘은 그 말 뒤로 한동안 먹기만 했다. 잡채의 간장맛이 과하게 짰다. 김치도 과하게 익어 신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묘하게, 그 짠맛과 신맛이 오늘만큼은 입 안에서 버틸 만했다.
"여기서 지낼 거야?"
엄마가 물었다.
"당장은."
"돈은?."
"일하면 들어오죠..."
엄마가 말없이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얇은 봉투. 끝부분에 누군가의 손때가 묻어 있었다.
"이건... 받기 싫은데."
"그럼 내 마음만 받아라. 봉투는 여기 두고 간다."
봉투는 책상 모서리에 남았고, 마음은 방 안 어딘가에 흩어졌다. 두 사람이 동시에 창문을 보았다. 복도 끝 창문 너머로 바람이 들고나갔다. 누군가 샤워실 문을 두드리며 "얼마나 더 해요"라고 외쳤다. 식당에서는 밥솥 뚜껑이 덜컥 소리를 냈다.
"너, 그 노래..."
엄마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엄마가 자주 부르던 그거. 자꾸 흥얼거린다며."
"끝까지는 안 불러요."
"왜?"
"끝까지 부르면, 어디가 무너질지 몰라서."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우리 둘 다, 반만 부르자. 반만 흥얼거려도... 오늘은 충분하다."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바구니를 정리하고, 쓰레기를 한데 모아 묶었다. 작은 움직임들이 방에 조금씩 질서를 가져왔다. 문 앞에서, 엄마가 한 번 더 돌아봤다.
"희숙아."
그 이름이 방 안으로 떨어졌다. 오래 숨기고, 참아둔, 그러나 여전히 유효한, 짧고 낯선 파문. 델마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음엔... 그 이름 말고 다른 걸로 불러요."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델마. 다음에 또 올게."
"와요."
"전화도 하고."
"할게요."
문 앞에서 엄마가 한 번 돌아봤다.
"델마."
"응."
"살자."
"응."
문이 닫혔다. 발자국 소리가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도 잠깐, 방 안에는 김치 냄새와 잡채 냄새가 머물렀다.
델마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내쉬었다.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 크게 웃었다. 또 다른 방에선 짧은 욕설이 이어졌다. 세탁기 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생활의 소리들이 켜켜이 쌓여 드럼통처럼 울렸다. 델마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봤다. 형광등이 또 한 번 깜빡였다. 빛이 아주 잠깐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그제야, 그녀는 아주 낮게 흥얼거렸다.
"흠흠흠-흐음- 흠흠으흠음-"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입술을 다물었다. 오늘은 거기까지면 됐다.
델마는 손등으로 눈을 훔치고 라디오를 껐다.
"엄마, 잘 가요."
작게 중얼거린 뒤, 베개를 고쳐 놓고,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웠다. 그리곤 이름을 가슴 안쪽에 단단히 눌러 붙였다. 희숙은 오래전에 그곳에 두고 왔다. 지금 이곳에는 델마가 있었다.
그리고, 살아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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