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메드 라흐만과 참치김치찌개
“
김 차장은 좁은 책상 앞에 앉아 이력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볼펜 끝은 "경력 사항" 칸 위를 맴돌다가 번번이 멈췄다.
내세울 만한 게 없었다. IMF 이후 공사판을 떠돌며 그저 버텼을 뿐인데, 그걸 뭐라고 적을 수 있을까.
건설사무실에 내야 할 이력서에 "한부그룹 영업팀 과장" 자리가 무슨 소용일까.
결국 "허리 튼튼합니다. 잡일 가능합니다."라는 말로 빈칸을 채웠다.
겨우 이런 말을 쓸 수밖에 없는 인생.
그는 두줄의 문장으로 이력서의 빈칸을 채우고, 깊은 한숨으로 좁은 고시원 방 안을 채웠다.
김 차장의 한껏 수그린 등허리 위로 301호 쪽에서 들려오는 알람소리와 끙끙대는 신음소리가 올라탔다.
처음엔 그냥 넘기려 했다. 하지만 소리는 그칠 줄 몰랐고, 더욱이 가만히 무시하기에는 그 소리가 더욱 빠르면서 불규칙한 리듬으로 바뀌고 있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김 차장은 천천히 301호 앞에 섰다.
그 방에 누가 사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새벽마다 인력시장에서 허탕치고 돌아오는 길, 고시원 복도에서 자주 마주치던 청년.
먼지 투성이 작업복에 늘 지친 얼굴이었지만, 마주칠 때마다 웃으며 인사를 건네던 청년.
“안녕하십니까, 형님.”
어눌한 발음의 그 말투가 떠올랐다.
몇 번 얼굴을 트고 나니 이름도 알게 됐다.
301호, 모하메드 라흐만. 방글라데시에서 왔다던 그였다.
문고리를 살짝 비트니, 안쪽에서 곰팡내와 땀 냄새가 훅하고 빠져나와 김 차장의 콧가를 스쳤다. 침대 위에는 라흐만이 땀범벅으로 누워 있었다. 시트가 몸의 모양대로 헝클어져있었고, 그 위를 흥건한 땀에 젖어 얼룩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머리맡에서 낡은 휴대폰이 지독하리만치 성실하게 울어댔다. 화면에는 "사장님"이라는 글자가 깜박였다.
김 차장은 짧게 숨을 고르고 휴대폰을 들어 귀에 댔다.
“여보세요?”
잠깐의 정적 뒤, 낮지만 다정한 기운이 배어 있는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라흐만?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오늘도 안 나오니까 걱정돼서 전화했다.”
김 차장은 낮게 말했다.
“예... 제가 같은 고시원 사는 사람인데요. 지금 열이 너무 많이 납니다.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수화기 넘어가 잠시 조용해졌다.
“... 그 친구, 무단 결근할 사람이 아닌데. 성실해서 다들 좋아했거든. 며칠 전부터 힘들어 보이긴 했어.”
“네. 병원에 가야 할 정도입니다. 적어도 오늘은... 쉬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수화기 너머에서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낮게 흘렀다.
“엄마 병원비 벌겠다고 몇 달을 무리하더니... 결국 사달이 났구먼.”
잠시의 침묵이 이어지다, 이내 그의 말이 이어졌다.
"알겠습니다. 라흐만에게 푹 쉬다 출근하라 전해주세요."
뚝! 통화가 끊겼다.
김 차장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오래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처음 고시원에 들어왔을 때, 인력시장과 공사판을 전전하다가 몸이 축나 매일 파스를 붙이고 살았다.
몸살이 나도, 챙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좁은 방에서 혼자 앓던 그 시간의 고독이, 지금 라흐만의 모습에 겹쳐 보였다.
302호, 자신의 방에서 그간 아껴두었던 해열진통제 두 알을 꺼냈다. 물컵을 들고 와 라흐만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라흐만 씨, 약 좀 드세요. 이거 좀 삼켜보세요.”
라흐만의 눈꺼풀이 힘겹게 들렸다. 탁한 눈동자가 흔들리다가 김 차장에게 겨우 멈췄다.
“... 형님... 고... 맙습니다...”
교재로 공부했다던 구어체 문법이 이상하리만치 김 차장의 가슴을 더 저미는 듯했다.
김 차장은 대답 대신 빈 물컵을 내려놓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에는 늘 그렇듯 식은 밥과 김치, 그리고 "1일 1개"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있는 라면 상자가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는 라면을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가스레인지 위에 누런 양은 냄비를 올리고, 김치를 잘게 다져 살짝 볶다가 물을 붓고 식은 밥을 풀었다. 공용 냉장고 깊숙이 넣어뒀던 계란 하나를 턱 깨서 넣고 젓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아껴뒀던 마지막 계란인데.."
김치계란죽이 바글바글 끓었다.
그 죽을 그릇에 담아 조심스레 301호로 들고 올라갔다.
그릇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라흐만의 축축한 얼굴에 닿았다. 김 차장은 그릇을 머리맡에 놓고 퉁명스레 말했다.
“타국에서 아프면, 본인만 서러운 법입니다.”
방문을 닫고 나오면서, 자신의 말이 생각보다 더 쓰게 들리는 걸 느꼈다.
며칠이 지났다.
이른 아침, 2층 식당에서 "탁, 탁, 탁" 칼질 소리가 났다. 고시원 식당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리듬이었다. 곧이어 지글지글 기름에 김치 볶는 소리, 참치캔 뚜껑이 따지는 소리, 마늘과 고춧가루, 대파가 한꺼번에 데워질 때 나는 그 매운 향이 복도를 타고 흘렀다.
오랜만에 번지는 "사람 사는 냄새"가 고시원 전체를 채웠다.
김 차장이 고개를 들었다. 천장 너머로 작은 기척들이 연달아 지나갔다. 식당 문 앞에서 쭈뼛거리던 라흐만이 김 차장의 방앞을 서성이다 노크를 했다.
“형님... 식사... 하십시오.”
식당에 들어서자, 낡은 식탁 위가 낯설 만큼 풍성했다.
참치김치찌개가 빨갛게 끓고 있었다. 노릇한 계란프라이가 접시에 겹겹이 놓였고, 노란빛의 방글라데시식 카레가 넓은 그릇에 담겨 있었다. 그릇마다 김이 나고, 접시마다 작은 천국이 열렸다.
“이게 뭡니까?”
김 차장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라흐만은 허리를 깊게 굽혀 90도로 인사했다.
말이 자주 끊기고 순서가 꼬였지만, 마음만은 정확했다.
“며칠 전 저는 매우 아팠습니다... 그러나 형님이 약을 주셨..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프지 않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기에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부디.. 반드시 드셔 주십시오.”
말 끝에 씩 웃으며 이를 보였다. 검은 얼굴 위에서 하얀 이가 반짝였고, 순간 식당까지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삐걱~ 문이 열리며 누군가 비틀비틀 들어왔다. 하이힐 굽이 복도를 스치며 지나온 술 냄새가 살짝 묻어 있었다.
델마였다.
그녀는 술집 일을 막 마치고 올라오던 길이었다. 코끝을 잡아끄는 냄새에 이끌려 식당 문을 열고, 테이블을 보자마자 눈이 번쩍했다.
“어머, 이게 무슨 냄새야... 으잉, 맛있겠다. 나도 먹어도 되죠?”
델마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숟가락을 쓱 집어 들었다.
찌개를 한 숟갈 크게 떠서 호~ 불고, 입안으로 밀어 넣자, 밝은 표정이 그 자리에서 피어올랐다.
“와, 이거 해장되겠는데? 라흐만~ 잘 먹을게~”
그리고는 라흐만에게 익숙한 듯 가볍게 윙크를 했다.
라흐만은 어깨를 움찔하더니, 쑥스러운 웃음으로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었다.
델마는 금세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을 탁탁 치며 복도로 나왔다.
“여러분~ 2층, 3층! 식사 안 한 사람들, 어서 식당으로 오세요! 밥 다 됐어!”
계단을 탁탁 내려치며 3층까지 올라가서 또 외쳤다.
“빨리 안 나오면 나 혼자 다 먹는다~ 얼른~ 오늘은 잔치다, 잔치!”
복도에 발소리가 하나둘 내려오기 시작했다. 슬리퍼 질질 끄는 소리, 세수만 대충 하고 나온 이의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졸린 하품이 뒤섞였다.
먼저 수연이 들어왔다. 손에 귤 몇 알이 쟁반처럼 포개져 있었다.
“아버지가 주신 건데... 다 같이 먹어요.”
귤 몇 개가 상 위에 동그란 태양처럼 쌓였다.
총무 아가씨는 비닐봉지를 들고 와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윙~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불고기 향이 퍼졌다.
“모하메드 라흐만 씨, 소고기는 괜찮으시죠? 이거 오늘 삼촌이 주고 가셨어요. 불고기예요.”
고소한 기름향이 찌개의 매운 향과 맞물리며 한층 더 진해졌다.
“예, 소고기... 라흐만은 소고기 먹을 수 있습니다.”
라흐만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어눌하지만 확실한 발음으로.
사람들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누군가는 계란프라이를 반으로 갈라 옆사람 그릇에 덜어주고, 누군가는 카레를 밥 위에 살짝 끼얹어 색을 입혔다. 누군가는 불고기 한 점을 밥과 함께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흐만이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김치찌개... 참치 캔 넣었습니다. 한국 김치찌개... 맛있습니다.
라흐만은 돼지고기 못 먹습니다. 참치 먹을 수 있습니다. 참치김치찌개 맛있습니다.
형님... 김치찌개 같이 먹겠습니까?”
김 차장은 찌개 국물을 한 숟갈 떠 마셨다.
생각보다 깊었다. 참치의 기름이 김치의 산미를 둥글게 감싸고, 오래 볶은 김치의 단맛이 맵기의 모서리를 매만졌다.
그는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어휴... 이거 술안주 딱인데.”
말은 무심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노곤하게 흘렀다.
“술안주라니요!”
델마가 웃으며 탕! 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건 해장이지~ 나 이거 한 냄비 먹으면 오늘 하루 멀쩡해~ 라흐만, 최고!”
식탁 위에 웃음이 번졌다.
누군가는 ‘국물이미쳤다’고 했고, 누군가는 ‘계란프라이 노른자 터졌다’고 탄식했다.
수연은 귤을 까서 옆사람 그릇에 쪼르르 올려두고, 총무 아가씨는 불고기를 잘게 찢어 밥 위에 덮밥처럼 얹어 주었다. 델마는 찌개를 후루룩 들이킨 뒤, 발그레해진 볼을 문질러가며 “캬~” 하고 소리를 냈다.
한참을 먹고 웃고 떠들다 보니, 좁은 고시원 식당이 순간 너른 연회장처럼 느껴졌다.
창문 밖엔 회색빛 하늘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식탁 위에는 각자의 살림살이에서 떼 온 햇살들이 모여 있었다. 귤의 주황, 카레의 노랑, 김치의 붉음, 프라이의 금빛, 쌀밥의 하양, 불고기의 갈색, 그리고 사람들 얼굴에 번진 따뜻한 빛.
식사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라흐만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다시 한번 허리를 굽혔다.
“형님, 약 감사합니다. 라흐만 약 먹었습니다. 더 이상 아프지 않습니다.”
그가 다시 씩 웃었다. 검은 피부 위에 하얗게 뜨는 미소.
김 차장은 말없이 물컵을 들어 보였다. 라흐만도 물컵을 들었다. 귤을 까던 수연도, 불고기를 나르던 총무 아가씨도, 해장을 끝낸 델마도 든 물컵들이 식탁 중간에서 딸깍딸깍 부딪혔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아주 사소한 기적이 매운 김과 함께 피어올랐다.
찌개를 연신 떠먹던 델마가 물었다.
“라흐만, 이거 어떻게 끓였대? 우리 엄마보다 더 맛있게 하는 것 같아.”
라흐만은 잠시 망설이다가 싱크대에서 작은 라면수프 봉지를 꺼내 들었다.
“이것을 조금 넣었습니다. 라면수프를 넣으면 국물 맛있어요. 라면수프는 한국의 마법입니다.”
식탁은 폭소로 가득 찼다.
“비밀 재료가 그거였냐?” 김 차장이 웃었고,
“우리 엄마 알면 난리 나겠다!” 델마가 배를 잡았다.
수연은 귤껍질을 벗기다 말고 물었다.
“그럼 이런 건 어떻게 알게 됐어요?”
라흐만은 미소 지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1년 전 한국 식당에서 일했습니다. 주방 아주머니가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다 없어요. 그러면 라면수프를 조금 넣으면 더 맛있어진다. 그래서 오늘 라면수프 해 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
사람들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서로를 바라보다가, 문득 머쓱해졌다.
그러나 곧 그 머쓱함마저 따뜻하게 풀려갔다.
밥을 다 비우고 나니 접시 위에는 각자의 하루가 얇은 기름막처럼 남아 있었다.
누군가는 그릇들의 정리를 시작했고, 누군가는 남은 찌개에 밥을 더 말아 마지막 한 숟갈을 챙겼다.
라흐만은 싱크대 앞에서 고무장갑을 끼고 “라흐만, 설거지합니다!”라고 외쳤다.
델마는 “헉, 신사네~” 하고 다시 한번 윙크를 날렸다.
김 차장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라흐만의 팔목에 맺힌 물방울을 툭툭 닦아 주려다, 괜히 어색해져 손수건을 접어 넣었다.
식당을 빠져나오며 김 차장은 잠깐 멈췄다. 새벽 인력시장에서 허탕치고 돌아오던 날들이 스쳐갔다. 굳게 닫힌 문짝들, “오늘은 사람 다 찼어~”라는 말들, 식은 국밥. 그리고 오늘의 뜨거운 찌개.
그는 복도 끝 창문 너머, 흐린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책상 위 이력서의 ‘특기 사항’ 칸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볼펜 끝이 움직였다.
‘특기 사항:
어려운 사람들 밥 먹이는 법을 압니다.
그리고 받은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들을 세상에 돌려줄 차례입니다.’
글씨가
다소 삐뚤었지만, 이번엔 이력서를 구겨버리지 않았다.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순간은, 거창한 날에 오지 않는다.
식은 밥 한 그릇을 데워 죽으로 만들고, 참치 한 캔으로 찌개를 끓이는 사이에 슬쩍 찾아온다.
새벽 인력시장에서 허탕치고 돌아온 사내와, 엄마의 병원비를 벌겠다며 몇 달을 무리하다 쓰러진 청년,
술집 일을 마치고 비틀거리며 올라왔다가 해장을 외치며 웃는 여자,
귤 몇 알과 불고기 한 봉지를 내어놓는 사람들이 한 상에 둘러앉았다.
그날 고시원 식탁 위에는 국적도, 종교도, 가난도 없었다.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뜨거운 국물과 서로를 바라보던 따뜻한 눈빛,
그리고 다음 끼니도 함께 먹자는 소박한 약속뿐이었다.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순간은,
사람들과 함께 둘러앉아 밥을 떠먹는 바로 그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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