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은 선불, 후회는 후불
택시 창밖은 어슴푸레한 새벽빛과 네온사인이 뒤섞여 있었다.
밤새 술 냄새와 담배 연기에 젖은 공기는 여전히 그녀의 옷과 머리칼에 매달려 있었다. 립스틱은 번져버렸고, 마스카라는 눈 밑에 검은 얼룩을 남겼다. 거울 속에서 본다면 분명 초라하고 피곤한 얼굴이겠지만, 델마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개의치 않는 듯 눈을 감았다.
라디오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You are my sunshine» 이었다.
“흠흠흠-흐음- 흠흠으흠음-”
목구멍이 울컥하면서도, 입술은 본능처럼 가사를 따라 움직였다.
그런 그녀를 룸미러에 걸린 기사 아저씨의 눈빛이 힐끔 훑었다.
“술집 끝났구만. 어디서 일해요?”
“그냥 술집이요.”
건조하게 내뱉었지만, 기사는 멈추지 않았다.
“아가씨 하룻밤 사려면, 얼마 주면 돼?”
순간적으로 속에서 울컥 치밀어올랐으나 델마는 태연한 척 창밖만 바라봤다. 가방끈을 쥔 손에만 힘이 들어갔다. 그 작은 틈새를, 기사는 파고들었다.
“이런 차 타는 손님 중에, 대답해주는 사람 많던데. 시큰둥하네. 아가씨는 무뚝뚝해서 손님들이 좋아나 하겠어? 침대 위에서도 목석같을 거 같은데.”
차 안의 공기가 점점 더러워져갔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를 즈음, 그의 손이 운전대에서 떨어져 그녀의 허벅지 위로 슬쩍 옮겨왔다.
역겨운 그의 손이 닿는 찰나, 그녀의 손목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이 씨X 새끼야!”
기사의 손을 세게 쳐내며 욕이 터져 나왔다.
“돈 준다고, 돈! 너 얼만데!”
그는 발끈하며 차를 세웠다. 델마는 차 문을 박차고 뛰쳐나오며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경찰 부를 거야. 기다려, 이 개자식아!”
형광등이 희뿌옇게 켜진 파출소 안.
의자에 앉은 델마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떨리는 손으로 신고서를 작성했다. 이름을 쓰려다 펜이 멈췄다.
윤희숙.
너무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은 이미 술집 골목에서, 고시원 복도에서, 아무도 부르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델마’라고 적었다.
“예명이에요?”
경찰이 비웃듯 물었다.
“내 이름이요.”
델마는 눈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조사는 형식적이었다.
경찰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고, 기사는 “오해다”라며 억울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피곤에 젖은 경찰의 눈빛은 ‘귀찮다’는 말을 이미 하고 있었다.
“보호자 연락처 없습니까?”
“필요 없어요.”
그러나 경찰은 이미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잠시 뒤, 넘겨 받은 수화기 넘어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숙이 거기 있냐?”
엄마였다.
델마의 숨이 막혔다. 오래전부터 등을 돌리고, 원망만 쏟아내던 목소리였다.
경찰에게 수화기를 돌려주려 했지만, 경찰은 그저 비릿한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끊어요.”
“아, 윤희숙씨가 따님 맞으시죠? 여기 파출소인데요.”
“끊으라고 했잖아!”
그녀는 수화기를 확 낚아채 내려놓았다. 차가운 쇠 소리가 탁, 책상 위에 울렸다. 경찰은 황당하다는 듯 웃었고, 그녀는 담배 불을 깊게 빨았다. 연기가 천장을 향해 삐뚤게 흩어졌다.
서울명문고시원 앞 골목에 도착했을 때, 이미 새벽 공기가 칼날처럼 차가웠다.
‘달밥·식권·아침식사 됩니다’라는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였고, DVD방 네온사인은 고장 난 글자만 깜빡였다. 델마는 터덜터덜 계단을 올랐다.
총무실 유리문을 톡톡 두드리자, 총무가 고개만 내밀었다. 스무 살 갓 넘은 얼굴, 밤새워 일한 티가 역력한 눈동자.
“늦었네요.”
“오늘 손님 기분이 좋더라니까. 노래를 한 곡만 부르게 두질 않더라고.”
“방세는 내일로 넘겨요?”
“모레~”
델마는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보였다. 억지웃음이 입술에 걸렸지만, 눈 밑의 그늘은 가려지지 않았다.
2층 복도는 늘 그랬다. 벽지는 갈라져 테이프로 붙어 있었고, 누군가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트로트가 새어 나왔다. 기침소리, 코 고는 소리, 라면 끓이는 냄새까지 섞여 좁은 복도를 가득 메웠다.
204호 수연이 사는 방 앞에서 잠시 멈췄다.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문틈으로 종이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글을 쓰는 소리일까, 잠결에 이불을 고르는 소리일까.
“살아 있나보네.”
델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남의 방 안부는 그 정도면 족했다.
방 안은 여전히 뒤죽박죽이었다. 싸구려 전신거울, 벗어던진 스타킹과 홀복, 구겨진 영수증과 텅 빈 소주병.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클렌징크림으로 립스틱 자국을 지우고, 번진 마스카라를 닦아냈다. 거울 속 얼굴은 매번 다른 사람이었다. 술집에서 쓰는 얼굴, 택시 안에서의 얼굴, 파출소에서의 얼굴, 그리고 지금의 얼굴.
“흠흠흠-흐음- 흠흠으흠음-”
멜로디가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그러나 끝까지 부르진 않았다. 끝까지 부르면 무너질 것 같았으니까.
그때, 복도 끝에서 술 냄새가 퍼지며 터덜터덜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델마는 방문을 살짝 열어 고개를 내밀었다.
“아이고, 델마.”
김차장이 비틀비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차장님, 또 어디서 마셨어?”
“어디긴, 세상에서 마셨지.”
웃으려다 실패한 그의 얼굴엔, 씁쓸함만 남았다. 델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 한잔 드릴까?”
“됐어. 물이 뭘 알겠어?.”
그는 손을 저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델마는 방문을 닫고, 작게 나있는 창문을 열었다. 새벽바람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문득, 오래전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울던 자신이 떠올랐다.
“윤...희숙.”
잊은 줄 알았던 이름. 그러나 오늘 밤, 택시 라디오와 파출소 수화기, 엄마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파고들며 살아났다.
델마는 눈을 감았다. 핸드백 속 동전 몇 개가 딸깍, 서로 부딪혔다.
내일도, 모레도 비슷한 무늬로 굴러가겠지. 그래도 어딘가로 가고 있다고 믿어보기로 했다. 아주 작은 불빛 하나가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동안만이라도.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골목 아래 두부 장수가 종을 울렸다.
델마는 입술을 달싹였다.
“참, 별짓 다 한다, 내가. 이렇게밖에 못사냐.”
그리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멜로디도, 눈물도, 내일을 위해 아껴두는 편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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