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 끄시지?
델마 옆방에 새로 들어온 건, 앳된 얼굴의 여자아이였다.
아빠는 일찍이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집을 떠났고, 엄마는 하루 종일 돈벌이에만 매달려 아이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언제나 뒷전인 기분. 아이는 차라리 진짜로 혼자가 낫겠다 싶어 집을 뛰쳐나왔다.
엄마 지갑에서 훔친 현금 몇 푼과, 집안 구석에서 팔 만한 것들을 내다 팔아 쥔 돈은 고작 몇십만 원.
그걸로 무작정 고시원에 들어왔다.
아이의 눈빛은 삐딱했고 행동은 거칠었다. 새벽마다 술에 취해 들어오거나 온몸에서 담배 냄새를 풀풀 풍겼다. 낮에는 늘 잠만 자고, 식당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 모습만 가끔 보였다.
그 생활 리듬 덕에, 새벽 퇴근하는 델마와 자주 마주쳤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 식으로 스쳐간 애들이 몇이나 있었던가.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꼭 자신이 처음 고시원에 들어왔을 때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어느 날, 델마는 술집에서 돌아오다 아이가 껄렁한 남자 무리에 끼어 고시원 앞에서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델마는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네 몸은 네가 지키는 거야."
"아줌마가 무슨 상관이야?"
바닥에 침을 퉤 뱉는 아이의 뒷모습은 날 선 칼날 같았다.
며칠 뒤, 아이는 입술이 터지고 눈가엔 멍이 들어 있었다.
옷은 여기저기 찢겨 있었다. 델마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네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할 거면서 혼자 살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야?.
집만 나오면 다 해결될 줄 알았지? 너 같은 핏덩이가 버틸 곳은 아무 데도 없어."
"아줌마가 뭔데 자꾸 참견이야?"
"아줌마? 이게 자꾸 누굴 보고 아줌마래?"
"당신 말이야. 후진 옷, 후진 화장, 후진 구두 신고 후진 멘트 씨불이는 그쪽. 지금 내 앞에 그쪽 말고 더 있어? 벌써 노안이라도 온 거야?"
언쟁 같지 않은 언쟁이 오갔다. 잠시 후 델마가 불쑥 물었다.
"밥은 제대로 먹냐?"
대답하지 못하는 아이. 델마는 망설임 없이 손목을 덥석 잡아 근처 "아침식사 됩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건 식당으로 끌고 갔다.
"이모, 백반 두 개요. 계란프라이는 서비스 알죠?"
주인과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시래기 된장국과 나물, 갓 무친 겉절이, 잡채와 제육볶음이 한 상 가득 차려졌다. 아이는 밥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이내 델마의 눈치를 살폈다.
"밥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얼른 먹어."
말이 떨어지자 아이는 정신없이 밥을 퍼먹었다. 금세 한 공기를 비워내자, 델마는 밥 한 그릇을 더 시켰다. 두 번째 밥은 조금 남겼지만, 그제야 아이의 경직돼 있던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배라도 불러야 딴생각이 안 드는 거야.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
그 말에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훔쳤다. 델마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밥값을 내고 방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복도에 쿵쿵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누군가가 델마의 방문을 세차게 발로 차고 있었다.
델마가 문을 열자, 아이가 서 있었다. 눈은 벌겋게 충혈돼 있었고, 입술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사실 아이의 발길질은 델마에게 향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동정한다고 여겨, 그게 싫어서 객기를 부린 것뿐이었다. 정작 화를 내야 할 상대는 따로 있었지만, 사춘기의 무모함은 언제나 방향을 잃는 것이었을 뿐. 분노를 어디다 터뜨려야 할지 몰라, 가장 가까운 문짝에다 발길질을 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슬쩍 문을 열어보다가 이내 닫아버렸다. 남겨진 건 복도 가득 메아리치는 울음소리와, 아이를 똑바로 바라보는 델마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델마의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 전의 기억 하나가 스쳤다.
십 대 시절, 술에 취해 집 대문을 발로 차며 소란을 부리던 날
“너 같은 건 없어져도 된다”던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던 그날 밤.
새빨간 구두굽이 부러지고, 무릎이 까져 피가 흘렀던 그때.
그 울음이, 그 객기가, 그리고 그 분노가 지금 이 아이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네가 부숴야 할 건 내 방문이 아니야. 네 생각이고, 네 상황이지.
잘 들어. 이 돈 가지고 집에 다녀와. 부수고 싶으면 거기서 부숴.
따지고 싶으면, 진짜 화가 나는 사람한테 가서 따져.
네가 말을 안 하면 아무도 몰라. 알아들을 때까지, 실컷 화내고 와."
델마는 돈 몇 장을 아이 손에 얹어주었다. 아이는 눈물에 젖은 채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손바닥에 올려진 지폐는 겨우 몇 만 원이었지만, 그 지폐 몇 장의 무게는 방보다, 현실보다, 훨씬 더 버겁게 느껴졌다.
델마는 한숨을 내쉬더니, 아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 화장 그렇게 할 거면 시도조차 하지 마. 할 줄도 모르는 게. 쯧.
너 그러는 거 구려, 엄청 구려. 나보고 후지다고 했지? 넌 구려. 구려서 역겨울 정도야."
그러곤 화장솜에 클렌징크림을 묻혀 아이의 화장을 지워주었다.
두 뺨 위로 흐른 눈물 자국이 클렌징크림에 묻혀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이는 짐을 챙겨 고향으로 내려갔다.
델마는 자신의 방 창문에 기대앉아, 고시원을 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작고 가녀린 몸보다 어깨에 매달린 눈물이 무거워 보여 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이 옆으로 두부를 파는 아저씨의 종소리가 딸랑딸랑하고 울렸다. 햇빛을 받은 작은 종은 유난히 반짝이는 듯했다.
이따금 델마는 그 아이를 떠올리곤 했다.
또 어딜 가서 못된 남자들과 얽혀 꿀꿀이죽 같은 인생을 살고 있을지, 아니면 고시원을 전전하며 아무에게나 화를 내고 있을지.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 인생 살기도 버거운데, 누구 걱정을 하고 있는 건가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한 가지, 그 아이는 울지 않았으면 했다.
며칠 뒤, 총무실에서 총무가 수화기를 들고 델마를 불렀다.
"델마 언니, 전화 왔어요!"
"나한테?"
델마는 수화기를 받아 들고 귀에 가져다 댔다.
"언니?"
"누구...?"
"저, 저번에... 방문 발로 찼던..."
".. 왜 전화했어?"
"언니 덕분에 저... 엄마랑 화해했어요. 그래서 고마워서..."
"아직도 화장하고 다니냐?"
"아니요! 저 이제 화장 안 해요."
"잘됐네. 앞으로는 화장하지 마. 엄청 구려."
"... 네. 저 그리고... 언니."
"잘 갔으면 됐어. 끊어."
"언니! 저, 검정고시 학원 다녀요."
"... 그래. 끊자."
수화기를 내려놓는 손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담배를 찾았다.
입술 사이로 연기를 내뿜으며, 델마는 툭 내뱉듯 중얼거렸다.
"별일 아니네. 잘 살면 됐지 뭐."
총무실을 나오며 고개를 살짝 젖히고 코웃음을 쳤다.
누구보다 쿨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그게 델마가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방에 돌아와 불 꺼진 천장만 바라보자, 가슴이 이상하게 저려왔다.
그 아이가 남긴 울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언니...”"
델마를 부르던 목소리, 끊기 전 매달리던 그 소리가 자꾸만 떠올랐다.
델마는 엄마가 쥐어준 봉투를 꺼내 들었다.
늘 손대지 못하던 지폐. 그날 아이에게 건넨 몇 장 덕분에, 봉투 속 돈이 지금껏 묵혀왔다는 사실이 더 선명히 느껴졌다.
"나 참... 구려."
웃으려 했지만, 목구멍이 턱 막히는 듯했다.
담배를 꺼내려다 말고, 그대로 고개를 베개에 파묻었다.
눈가가 뜨겁게 젖어가는 걸, 아무도 모르게 숨겼다.
혼자라는 사실은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게 흘리는 눈물도,
엄마가 쥐어준 돈을 열어보지도 못하는 겁쟁이라는 사실도,
어렸던 나를 마음껏 떠올려보지 못하는 사실까지도
그리고 그 아이 속에 비친 내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들키지 않을 수 있으니까.
#고시원 #신림동 #청춘소설 #단편소설 #옴니버스
#인생이야기 #자취 #하숙 #힐링소설 #나도뱃지줘라브런치양반들아 #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