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모델은 아이의 마음에 불을 켠다

by 이채이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가 유독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혹은 아이돌에 깊이 빠지는 시기가 있다. 그럴 때 부모는 종종 고민한다. "이런 관심이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시간 낭비가 아닐까?" 하지만 나는 그 관심이 오히려 성장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관심은 어쩌면, 아이가 처음으로 외부 세계에서 ‘닮고 싶은 존재’를 만난 순간일지 모른다. 그때 부모가 할 일은 단 하나. 그 우러름이 롤모델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것.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 무렵, 피겨스케이팅 세계 챔피언 김연아 선수를 무척 좋아했다. 경기를 돌려보며 감탄하고, 스핀과 점프 같은 동작 하나하나에 넋을 놓고 빠져들곤 했다.

어느 날 서점에서 김연아의 자서전인 『김연아의 7분 드라마』를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아이에게 선물했다.

올림머리를 야무지게 틀어 올리고, 드레스를 입은 김연아가 강한 눈빛을 보내는 표지 사진 앞에서 아이의 눈빛도 표지 속 김연아처럼 반짝였다.


그날 이후, 아이는 그 책을 정말 수십 번이나 읽었다. 책이 닳아서 해질 만큼 반복해 읽으며, 어렵던 피겨 용어까지 스스로 익혀갔다. 아이는 그 세계를 온몸으로 이해하려 했다.

반복되는 엉덩방아와 부상, 슬럼프를 견디며 다시 일어선 김연아의 이야기는, 아이에게 진정한 ‘극복의 서사’였다.

무엇보다, 어린 나이의 김연아가 어떻게 매일 묵묵히 최선을 다했고, 큰 대회를 앞두고도 마음을 다잡는 법을 익혀갔는지, 그리고 내일이 아닌 오늘을 다음이 아닌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 말하곤 했다. 그 모든 이야기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우리 아이에게 딱 맞는 ‘삶의 언어’였다.


김연아는 인터뷰에서 “매일 최선을 다해 살아냈고, 그 하루하루가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곤 했다.

아이에겐 김연아의 결실과 보람도 흘리는 눈물 하나까지도 모두 닮고 싶은 꿈이 되었다.

그 책을 읽은 아이는, 공부든 운동이든 포기하지 않는 태도, 조용히 자신과 싸우는 집중력을 갖게 되었다. 일상생활에서 그 변화는 눈에 띄었다. 스스로 일과를 확인하고, 자신만의 리듬을 갖기 시작했다.

중학생이 된 아이에게, 내가 읽고 있던 책 한 권을 건넸다.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자서전이었다.

아이도 이내 그 책에 빠져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와 강수진에게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 다 '조금 늦게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강수진은 또래보다 늦게 발레를 시작했지만,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달빛에 기대 연습하며 그들을 따라잡았다. 발가락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슈즈에 살코기를 넣어가며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강수진은 무대에 오르기 전뿐만 아니라, 평소 연습 전에도 두어 시간씩 철저히 몸을 풀었다. 최고가 되기 위한 준비는 이미 그 이전에 시작되고 있었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이야기를 읽은 아이는, 자신의 어려움이 사실은 특별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정말 최고가 되고 싶은 사람은 남들보다 먼저, 더 철저히 준비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중학교 시절 처음으로 본격적인 공부에 뛰어든 아이는 이 책을 읽고 극복의 미학과 훈련의 중요함을 체득했다. 또한 강수진처럼 하나씩 따라 하면서 악바리 근성을 발휘해 최고의 성적을 만들어 냈다.

"살기 위해 연습한다는 것은 오로지 나만을 의식하며 연습하는 것이다. 연습에서 남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남이 보기에 18시간을 연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18시간을 연습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 강수진,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 중에서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떳떳한 공부, 내 만족이 있는 공부, 배움의 즐거움이 있는 공부, 수량화된 몇 시간의 공부가 아니라 내 안에 남는 공부가 중요함을 배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새로운 롤모델들을 스스로 찾기 시작했다. 책 속 인물뿐 아니라, 학교 선배나 선생님, 어떤 날은 자기 자신을 롤모델 삼기도 했다. 닮고 싶은 사람을 좇는 일에서,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자라는 아이에게는 반드시 ‘롤모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시를 따르는 것이 아닌, 닮고 싶은 존재가 생겼다는 것은 아이가 자기만의 방향성을 갖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말로 하는 충고보다, 아이 스스로 설정한 롤모델이 전해주는 무언의 메시지는 더 힘이 있다.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건 결국 우리가 되고 싶은 무엇이니까.


아이의 관심을 흘려보내지 않고, 삶의 이야기로 연결해 주는 것이야말로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의미 있는 격려 아닐까. 그들의 땀과 눈물, 실패와 성장의 서사를 책이라는 매개로 연결해 줄 수 있다. 그 순간, 아이는 단순한 팬심을 넘어 자기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된다.


좋은 롤모델은 한 시간의 공부보다 더 오래 감동을 남긴다. 내 아이가 김연아와 강수진을 통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의 삶이 또 다른 누군가의 꿈을 깨우는 것은 어쩌면 기적이다. 그 기적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시작될 수 있다. 부모가 권한 책 한 권이 아이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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