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점보다 소중한 61점

by 이채이


61점.

중학교 첫 시험을 치른 아이가 성적표를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직감했다. ‘쉽지 않은 결과구나.’ 숫자는 선명했고, 그 위로 조용히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소리 없는 슬픔이 교복 치마 위로 후두둑 쏟아졌다. 그 작은 어깨 위에 세상의 벽, 자신에 대한 실망, 막연한 두려움이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천천히 안았다. “수학, 많이 어려웠지?” 아이의 눈가엔 아직 눈물이 맺혀 있었고, 그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아이의 입에서 조용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선생님 말만 잘 들으면 성적 잘 나온다더니... 다 거짓말이야.” 그 말은 어쩌면 나를 향한 항변이었을지도 모른다.


사교육 없이 중학교에 입학한 아이. 나는 다독이려는 마음으로 “학교 수업이면 충분해.”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 성적표는, 이 세상이 얼마나 냉정한지를 아이보다 내가 먼저 직면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보며 나는 다짐했다. 어떤 점수도 이 아이를 흔들게 두지 않겠다. 이 슬픔을 넘어서는 힘을 반드시 함께 만들어주겠다고. 그날 이후, 나는 묻기 시작했다. 무엇이 우리 아이에게 진짜 최선일까? 불안을 먹고 자라는 사교육, 정답만 외워가는 쳇바퀴. 그 구조는 아이를 어디로 데려갈까? 내 아이만큼은 경쟁의 회전목마 위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조금 느려도 좋으니, 스스로의 걸음으로 자라나길 바랐다. 책을 읽고, 세상에 “왜?”라고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아이. 성적이 아닌, 목적 있는 삶을 살아가는 아이로 자라나길 바랐다.


며칠 뒤, 아이가 물었다. “나... 학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말속엔 실패한 자의 낙인 같은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마치 이 점수가 엄마 탓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말없이 성적표를 바라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학원은 언제든 보내줄 수 있어. 하지만 지금 진짜 필요한 건, 네가 너 자신에게 묻고 답하는 힘이야.” 그리고 덧붙였다. “네 주변엔 경쟁자가 없어. 네가 이겨야 할 건, 어제의 너야.”


기말고사까지 두 달. 아이의 표정은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공부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고민했고, 자신만의 계획을 세웠다. “오늘은 몇 페이지를 볼 거야.” “이 문제는 다시 풀어볼래.” “이건 내가 이해 못 해서 틀렸던 거니까 반복할게.” 아이의 하루엔 작지만 분명한 자기 약속들이 생겨났다. 자신과의 약속. 도서관 문을 닫는 마지막 순간까지, 항상 아이가 있었다. 나는 주말마다 도시락을 싸서 그 손에 건넸다. 작은 손에 도시락을 쥐여주는 그 순간, 뭔가 짠하면서도 따뜻했다.


문제집 세 권. 그걸 품에 안고 시작된 여정. 공부의 양만큼 자신감이 쌓였고, ‘나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자라났다. 아이의 말투는 단단해졌고, 눈빛은 흔들림 없이 맑았다. 시험 당일 아침, 나는 웃으며 말했다. “오늘 시험, 쉬운 문제만 나올 거야. 걱정 말고, 다녀와.” 긴장된 얼굴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 하나면, 충분했다. 며칠 뒤, 성적표가 나오는 날. 아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숨을 죽였다. 침묵은, 때로 가장 큰 암시다.


그리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나, 수학 100점 받았어.”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잘했어. 정말 장하다, 우리 딸.” 그날, 아이를 기쁘게 한 건 단지 점수가 아니었다. 스스로 결정한 과정을 끝까지 해낸 자신에 대한 신뢰. 그것이 가장 큰 결실이었다. 두 달 전, 눈물 흘리며 고개를 숙이던 아이는 이제 세상을 당당히 마주할 줄 아는 한 사람으로 성장해 있었다.

나는 확신한다. 사교육이 감당할 수 없는 시기가 반드시 온다. 고등학교에 가면 학습량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난다. 그때, 공부의 본질을 모른 채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아이는 금세 무너질 것이다. 초등 시절, 사교육보다 중요한 건 독서다.


중학생 때의 점수는 특목고를 준비하지 않는 한, 입시와는 거의 무관하다. 중학생 시절은 ‘스스로 공부하는 힘’을 기르기 위한 훈련기다. 지금 점수가 조금 낮더라도 스스로 계획하고 도전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경험을 해야 한다.


그 경험이 아이의 뇌를 자극하고, 마음을 단단하게 만든다. 넘어지지 않는 아이가 아니라, 다시 일어설 줄 아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 그 아이가 인생의 더 큰 벽 앞에서도 자신을 믿고 다시 걷게 될 테니까. 그러니 부디, 아이에게 넘어질 기회를 주자. 그리고 함께 기다려주자. 그 아이가 스스로 다시 일어나는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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