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못 봐도 괜찮은 까닭

- 책을 읽고 있다면... 마침내 기다리는 순간이 온다.

by 이채이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이가 조금 불안해했다. 처음 겪는 ‘반 배치 고사’ 때문이었다.

처음 듣는 시험인데, 친구들 말로는 굉장히 중요하단다. 다들 학원 특별반에 등록해 열심히 대비하는 분위기였다. 입시도 아닌데, 분위기는 입시처럼 돌아갔다.

우리 아이만 준비가 없었다. 학원도 안 다니고, 과외도 안 받는다. 그냥 평소처럼 책 읽고 놀다가 시험을 봤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냉정히 말해 하위권이었다. 그런데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점수는 그저 숫자일 뿐이다. 아이의 진짜 역량은, 시험 하나로 판별할 수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남들보다 일찍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시작한 사교육 앞에 무릎을 꿇고 사라져간 아이들. 교직 생활 25년 동안 그런 장면을 수도 없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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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아이가 과학 수업에서 겪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선생님이 칠판에 그래프를 하나 그리셨다고 했다. 온도, 시간, 비열. 그리고 이렇게 물으셨다.

“이 그래프를 보고, 물과 식용유 중 어떤 게 비열이 더 큰지 설명해볼 사람?”

처음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선뜻 손을 든 남자 아이가 말했다.

“물의 비열이 큽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학원에서 배웠습니다.”

선생님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아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래프를 찬찬히 읽어보고, 이렇게 설명했다.

“식용유는 15도 올라가는데 2분이 걸렸고, 물은 4분이 걸렸어요. 더 오래 걸렸다는 건, 열이 더 많이 들어갔다는 뜻이고, 그래서 물의 비열이 더 크다고 생각했어요.”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이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유도했다.

“이렇게 정확히 이해하고 설명한 건 네가 처음이야.”


그 아이가 바로, 우리 아이였다. 한 번도 학원을 다닌 적이 없다. 과외도 해본 적 없다. 하지만 늘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 보면, 생각하고, 스스로 연결 짓는 훈련이 매끄럽게 자동 연결된다. 그래서 가능한 대답이었다.

지식은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하고 연결하며, 세상을 해석하는 도구다. 그렇게 스스로 깨닫고 익힌 지식은 오래 남는다. 그리고 언젠가, 그것이 아이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그날 이후, 아이는 수업이 재밌어졌다고 했다. 모르는 걸 알게 되는 기쁨, 스스로 깨닫는 즐거움. 그건 누가 대신 알려줄 수 없는 경험이다.


나는 ‘성적’보다 ‘배움의 즐거움을 깨닫는 경험’을 더 믿는다. 그 깨달음이 강렬하게 지식욕을 자극하고 자존감을 높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스스로 이해한 후의 기쁨은 아이가 배움의 고삐를 스스로 잡게 만든다.

나는 그 힘을 믿었다. 내가 점수에 연연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스스로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 그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동기야말로 가장 오래가고 강력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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