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에서 벗어나는 타이밍 전략
고객을 상대하는 일을 하다 보면
직종이 무엇이든 ‘갑’과 ‘을’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게 된다.
카페의 바리스타도,
상담하는 컨설턴트도,
온라인 판매자도,
디자이너도 역시 마찬가지다.
고객이 만족하는 순간도 있지만,
때론 내가 ‘을’이 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나 역시 로고 디자인을 하며
‘을’의 자리에 서본 적이 많았다.
요즘은 로고를 사용하는 곳이
정말 생각보다 훨씬 많다.
창업을 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거나
작은 브랜드를 시작할 때도
로고는 필수다.
그래서 많을 때는 일주일에
10건이 넘는 의뢰가 들어왔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다양한 업종에서 요청이 온다.
음식점·카페·학원·미용실·
반려동물 업종은 물론이고,
온라인 쇼핑몰과 SNS 마켓,
각종 전문 서비스와 컨설팅 회사까지,
브랜드가 존재하는 거의 모든 곳에서
로고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온라인 환경에서
그 중요성이 더 커졌다.
카카오맵에 매장을 등록하거나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를
운영할 때, 로고는 신뢰도를
높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창업 초기에는 로고 등록을
마쳐야 상세페이지 작성,
사업자 등록, 마케팅 시작 등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래서 고객들은 가능한 한
빠른 시안을 원한다.
하지만 작업 기간을 기다렸다가
시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만을 표하기도 한다.
“시안 받는 데 2일이 걸렸는데,
수정하는 데
내일까지 또 기다려야 한다구요?”
라는 말이 나오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로고는 약속한 기한 안에 전달했더라도
고객이 수정을 요청할 때 에는
수정 작업 시간이 필요하다.
미리 안내했어도 고객은
‘또 기다려야 한다’는 불만을 내놓는다.
특히 고객이 사업을 시작하려면
로고가 먼저 완성돼야 간판, 명함, 홍보물 등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그 마음이 이해된다.
하지만 디자이너는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괜히 내가 고객의 흐름을 막은 듯한 미안함이 스며든다.
그리고 그 순간, 디자이너는 금세 ‘을’의
위치에 서게 된다.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으며
나름의 해법을 찾게 되었다.
바로 작업일 안내하고,
실제로는 조금 더 빠르게
디자인 시안을 전달하는 것이다.
무리하게 작업을 서두르라는
의미는 아니다.
조급하면 반드시 실수가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3일 내 제작 가능하다고
안내한 뒤 2일 차에 시안을 전달드리는 것 이다.
“소중한 시간을 아껴드리고자
신속히 전달드립니다”라는
메시지를 함께 전하면,
고객은 디자인 퀄리티를 떠나
먼저 진심을 느낀다.
관계가 부드러워지고, 신뢰도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 방식을 적용한 뒤에는
“너무 빨리 줘서 대충 만든 것 같다”는
피드백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생각보다 빨리 받아서놀랐다”,
“감사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리고 시안을 빠르게 전달했기 때문에
수정 일정도 여유롭게 안내할 수 있었다.
단, 이 방법의 전제는 분명하다.
빠르게 작업하더라도 고객이 작성한
의뢰서의 핵심을 반드시 담아야 하며,
실수 없이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속도보다 우선은 항상 정확함이다.
디자이너는 ‘을’도 아니고, ‘갑’도 아니다.
브랜드의 시작을 함께 그리는
고객의 동등한 협업자다.
이 관계가 건강하게 유지되어야
오래, 그리고 즐겁게 일할 수 있다.
로고 디자인은 감정과 감각이
함께 작동하는 예술 작업이다.
디자이너 자신이 존중받고,
작업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에서
진짜 감각이 나온다.
디자이너가 ‘을’로 끌려가지 않고,
감각이 자연스럽게 ‘을’렁이는 상태에서
고객과 소통할 때 비로소
고객이 만족하는 좋은 디자인을
담을 수 있다.
그럴 때 서로 갑과 을이 아닌,
브랜드의 시작을 함께 여는
파트너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디자이너는 단지 결과물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아닌,
고객의 첫 시작을 함께 열어주는
존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