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11
그러자 신산은 “그래 그 참 잘 생각을 했다. 마을에 부자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곳에 와서 이런 일을 한데서야 어디 말이나 되는가? 그래, 내일 하루 구경이나 하고 올라가거라.”하였다.
없는 집 자식으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많은 고생을 하며 자라기는 했으나 그는 언행이 일치하고 누가 보더라도 양반의 후손이라 할 만큼 도의와 의리를 겸하고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듯이 어제 낮에 만났던 성산 어른과 그와는 천항지간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것은 성산 어른을 헐뜯으려고 하는 말도 아니요, 김수진씨를 두둔해서 하는 말도 아니다. 타고난 인간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도 하고 기쁘게도 하니까 하는 말이다.
하루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어제 날에 겪은 일들을 하나도 빼지 않고 그대로 다 말을 했다. 그러자 신산은 “그러면 그렇지 중앙선에서는 새벽차가 없거든. 성산 형님의 잘못 때문에 지난밤에 큰 고생을 했구먼.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오늘 아침에 일을 가자고 했지.” 하면서 도리어 미안하다는 듯이 말을 했다.
잠시 후 우리 두 사람은 신산의 집으로 돌아갔다. 들어가기가 바쁘게 저녁상이 들어왔다. 타성의 부인에게 패를 끼친다고 생각을 하니 낯이 붉어질 정도로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 그렇게 된 이상 도리가 없다.
그의 처 신산댁은 나이가 젊어서가 아니라 양귀비 같은 미인이었다.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모든 범절을 보아서는 양반의 집 자손이 분명한 듯했다. 저녁상을 물린 뒤 나는 신산과 작별을 하고 그 댁을 나왔다. 자고 가야 한다고 많이 만류를 하였지만, 타성인 내가 그 댁에서 잘 수는 없는 일이다.
행길에 나가보니 어제저녁과 다름없이 가로등불이 훤히 켜져 대낮과 같고 길거리에 오가는 행인들도 어제와 변함없이 복작거린다. 그러나 어제 저녁에는 그렇게 무겁던 발길이 같은 길인데도 오늘은 그와는 정반대로 마음부터가 날 것만 같았다. 힘이란 것이 사람의 육체 속에 든 것이 아니라 어줍지 않은 한 조각 돈 속에 사람의 힘이 들어 있음을 직감했다. 돈이 주머니 속에 들어 있으니까 그렇게도 부럽던 그들이 이제는 전연 그렇지가 않다. 사람의 힘을 빼앗아가고 주고 하는 것이 돈이다. 돈이 있으니까 걱정이 전연 없다. 한 주일을 논다고 해도 집에 갈 차비는 남을 터이니까. 도회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그 이유가 하루 일을 잘하게 되면 농촌에 비해 열흘 품삯을 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시가지 야경을 구경한 뒤 나는 하숙집을 정했다. 그다지 화려한 집은 못되어도 하루 밤을 쉬어 갈 집으로는 족했다. 이부자리 하나만 보아도 부자라고 하는 고향에 우리 집 보다가는 월등하다. 그러나 하루 종일 무거운 쌀가마니를 메고 다녔더니만 두 다리가 뻣뻣하여 화장실에 들어가서 앉을 수가 없다. 오금이 통 붙어주지를 않는다. 일본 여인네들이 들판에서 소피를 보듯 나도 반쯤 구부린 채 볼 일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 하나만 보더라도 그놈의 선창 일이 얼마만큼 힘이 드는지 가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숙집에서 하루 밤을 지난 뒤 나는 곧바로 바닷가로 나갔다. 바다 바람이 약간 차갑기는 하나 그래도 호주머니 속에 돈이 있으니까 그다지 춥다는 느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륙도 저쪽 편에서 솟아오르는 햇빛을 한 아름 안고 제2부두라는 해변에서부터 제3부두 쪽으로 가만가만 걸어갔다. 작은 배, 큰 배, 수없이 많은 배들이 모여있는 바닷가에는 코를 찌르는 물비린내가 역취를 나게 할 정도이다. 아침 공기가 유난히 좋다고 하던 말죽노인의 말씀과는 판이하다.
제2, 제3부두에는 아침 일찍이 나가기만 하면 일거리가 얼마든지 있다는 노인장의 말을 들은 적이 있는지라, 나는 그날 아침에 그리로 나가보는 것이다.
얼마동안 걸었다. 배들이 많이 매여있는 길가에서 중년 부인 한 사람이 빵을 팔고 있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동그랗게 생긴 그 빵은 보기부터가 먹음직스럽다. 그래서 나는 가던 발길을 멈추고 포장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빵을 샀다. 나보다가 먼저 다른 젊은 사람들이 사오 명 빵을 사 먹고 있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달처럼 생긴 것이 꼭 우리나라에 송편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빵이란 말만은 들어보았어도 빵의 형태가 그렇게 생겼다는 것은 처음 구경한다. 지금까지 아침 식사를 하지 않은 나는 빵을 먹어보았다. 꿀과 같이 달고 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