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현재
일본어를 전공하며
해외여행 자율화만 기다렸다.
심지어 대통령 공약에 그 사안이 담긴다면
무조건 뽑아야지 할 만큼 간절했다.
삼십여 년 전,
내 나라 밖을 나가본다는 건 꿈같은 일이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며
그 꿈이 현실이 되었다.
첫 대상은 가까운 나라 일본.
교과서로만 배우던 언어를 써볼 수 있다는 설렘,
젊음과 꿈이 어우러진 흥분 속
처음 밟은 일본 땅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부산 토박이 귀에
간지럽게 스며들던 외국어의 낯선 억양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부딪히며 치열하게 배워 나갔다.
세월이 흘렀다.
그 풋풋한 첫 여행 후
일본을 수없이 오갔고,
20대의 몇 해는 그곳에서 공부하며 지냈다.
일본어는 내겐 두 번째 모국어처럼 편한 언어다.
평생 일본어를 사용하며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인생은 알 수 없는 길.
24년 전, 나는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내 뜻과 달리 흘러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지나온 길 위에서
스스로 위로한 문장이 있다.
때로는 신에게 항변도했다.
그때마다 돌아온 듯한 응답.
“네가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처음엔 거부했던 것 같다.
"왜 나만 참아야 하지"라는 반발심이 일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 안의 단단한 아집들이
조금씩 무너져갔다.
삶에서 만난 악재와 악연,
그 지난한 세월이 없었다면 감사할 줄 모르는 어른이 되었을 지 모른다.
부모의 사랑, 형제애, 끈끈한 벗들과의 우정
무엇보다 보석같이 반짝이는 내 두 아이.
그 삶의 동력이 나를 이끌어서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걸 알아가는 요즘이다.
감사는 깨닫는 자의 몫이기에,
나는 가진 것보다 더 누리고 사는 편이라 믿는다.
믿음은 내 삶을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 주었다.
부족한 엄마를 누구보다 존중해 주는
아들 딸로 인해 기쁘고 감사하다.
힘들 때 나를 나되게 해준 아이들이다.
엄마는 오랜 세월 병상에 계신다.
먼 타국살이에 해마다 한국을
방문하는 일이
녹녹치 않다.
그래도 엄마가 잘 버텨주시면
매년 오겠다고 한 약속을 지켜간다.
내 아이들이 나를 버티게 해주듯
내가 엄마에게
그런 딸이라 해주시니 그것도 감사하다.
일본 오사카에서 공부하던 그때
무려 35년쯤 전이다
나를 방문한 엄마와 오사카 중심가에서
작년 친구와 일본의 소도시 마츠야마를 여행했다.
엄마와 찍은 뒷 배경의
본점 카니도락- 35년 전-
마츠야마 지점 카니도락-1년 전 친구와-
2024년 오사카 본점 카니도락
삼십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같은 장소에 서 본 감회가 묘하다.
덧붙임)
두 가지 연재를 나누어 하다가
하나로 붙혔어요
발행일을 못 지키고 어수선해져서
죄송합니다.
일본 이야기가 이어지게 되어서
연일로 발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