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관 출신 변호사의 대형로펌 적응기 - 3편
지난 글에서 나는 높은 업무강도가 나를 빠르게 성장시킨 면이 있다고 했다.
오늘은 이에 대해 조금 자세히 써보려고 한다.
대형로펌에서 일하며, 나는 확실히 변호사로서 성장하고 있다.
그런데 '변호사로서 성장한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걸까? 아마 변호사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어떤 변호사는 법학 글쓰기 실력이 향상되는 것을, 어떤 변호사는 일처리가 빠르고 정확해지는 것을 성장의 척도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변호사로서 성장한다'는 말을, '의뢰인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변호사가 되어간다'는 뜻으로 생각한다. 글을 유려하게 쓴다거나 서면을 빠르고 정확하게 작성하는 건, 의뢰인의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여러 조건들 중 하나일뿐이지, 핵심은 아니다.
내가 이와 같이 생각한 이유는 사무관 시절의 경험 때문이다.
공무원은 기본적으로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직업이다(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입법은 사실상 정부가 한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따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특히 사무관이라면 법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지난 글에서도 적었듯이, 그래서 나는 법률자문에는 무리없이 적응할 수 있었다. 공무원 시절 내가 자주 하던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공무원과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법을 바라보는 태도가 다르다.
공무원에게 법은 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할 때 사용되는 수단이자 도구다. 관련된 법이 없다면 만들면 되고('제정'이라는 표현을 쓴다), 법이 현실과 맞지 않다면 법을 개정하면 된다. 이 태도는 법률자문을 받을 때도 이어져서, 나는 보통 법률자문의 결론에만 관심을 가졌지 그와 같은 결론이 도출된 근거를 꼼꼼히 따져본 적은 없었다. 근거에도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단 하나, 그 근거를 역이용하여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지 검토할 때뿐이었다.
반면 변호사는 (특히 연차가 낮을수록) 법과 판결에 맞춰 사실관계를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변호사는 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할 수 없고, 판결을 바꿀 가능성도 낮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의뢰인의 질의에 단순히 법과 앞선 판결들을 대입하여 '된다, 안 된다'는 식으로 대답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그런데 의뢰인의 입장에서 이러한 대답은 의미가 없다. 나도 공무원으로 일하던 시기 '안 된다'는 식으로 법률의견서가 오면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즉, 변호사는 의뢰인의 질의에 단순히 법적 검토의견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의뢰인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지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변호사로서 성장한다'는 말을, '의뢰인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하면 문제해결능력을 갖춘 변호사가 되어간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문제해결능력이 뛰어난 변호사'는 어떻게 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아래 2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1. 전문분야에 맞는 법률지식
내가 알기로 우리나라에는 약 5,000개의 법률이 있다. 법률이 이 정도이니, 시행령이나 시행규칙, 그 밖에 소관부처들이 운영하는 지침 등은 훨씬 많을 것이다.
변호사 개인이 이 모든 법령들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변호사들은 자신의 전문분야를 정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전문분야로 건설부동산을 선택했다.
이러한 전문분야 법률지식을 쌓기에 대형로펌은 최적의 직장이다. 일단 사건을 맡으면 그 분야를 매우 깊게 파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파고 들어가야' 한다. 어설픈 지식으로는 의뢰인에게 답변을 해줄 수가 없다. 의뢰인도 그 업무를 해온 지 오래여서 관련 법령들을 어느정도 알고 있고, 의뢰인의 상대방(분쟁의 상대방) 역시 그렇다. 얕은 지식 수준으로는 의뢰인을 상대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출퇴근 시간을 활용해 업무 관련 책을 따로 읽고 있다. 너무 힘들 때면 최신 판례 평석이라도 읽는다. 평석은 사실관계와 법리를 친절하게 풀어 설명해줘서 이해하기 훨씬 쉽다.
내가 무쇠체력이라서 이렇게까지 하는 건 아니다. 여기에 적기도 부끄럽지만 내가 일을 막 시작했던 시기 '선급금'을 '계약금'으로 해석하여 엉뚱한 초안을 작성한 일이 있었다. 변호사라면 내가 무슨 마음인지 이해하겠지만, 아주 터무니없는 실수다. 더 민망하게도 파트너 변호사는 오히려 나를 감싸곤 처음부터 초안을 다시 작성했다. 변호사시험에서는 선급금보다는 계약금이 훨씬 중요하게 다루어지기 때문에 내가 무의식 중에 계약금이라고 판단해버린 것이었지만, 건설 분야에서는 도급계약이 자주 체결되는 만큼 선급금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이 때 나는 내 지식이 일천함을 깨달았고, 출퇴근길 독서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시작된 출퇴근길 독서는 지금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2. 법률 외 해결방법에 대한 지식과 경험
앞서 말했듯이 나는 좋은 변호사를 '의뢰인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변호사'로 정의한다. 그런데 문제해결은 꼭 법적인 방법으로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저번 글에서 내가 썼듯이, 소위 '정치적인 해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 특히 행정청을 상대로 할 때는 이 부분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로펌에서 일하다 보면 위와 같은 '정무적 감각'이 없는 변호사들을 볼 때가 많다.
하루는 선배 어쏘 변호사가 쓴 의견서를 볼 일이 있었다. 의뢰를 받아 건설회사를 대신해 행정청에 제출할 의견서를 작성한 것이었다. 건설회사가 행정청으로부터 제재 처분을 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글이 논리적이긴 했다. 문제는 행정청의 처분에 대해 위법하다고 주장하면서, 추후 감사청구나 공무원 개인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도 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는 부분이었다. 심지어 이 내용은 파트너 변호사의 검토까지 받아 의뢰인에게 전달된 상황이었다. 다행히 의뢰인이 그 부분을 삭제하면서, 실제 행정청에 제출된 의견서에는 그와 같은 내용이 담기지 않았었다.
공무원 경험이나 대관 업무 경험이 없는 사람은 위와 같은 내용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를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의견서는 안 내니만 못한 최악의 의견서라고 생각한다. 심하게 말하면 '자살행위'다.
공무원 입장에서 그런 의견서를 받아봤다고 해보자. 감사를 받을까봐, 손해배상 소송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움츠러들고 처분을 취소할까? 절대 아니다. 오히려 감사받을 여지가 없게끔 훨씬 더 신경써서 처분사유를 찾아내고 처분의 논리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뿐이면 다행이다. 오히려 다른 사유를 들어 더 강한 후속 처분이 날아들 가능성이 크고, 처분을 한 부서 외에 다른 부서들까지도 적으로 돌아설 가능성마저 있다.
행정청에게 강하게 맞서는 게 필요할 때도 있긴 하지만, 아무 때나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해당 건설회사가 그런 위험한 내용을 삭제한 걸 보면 아무래도 그 회사는 이러한 감각이 어느정도 있었던 듯하다.
위 두 가지 조건 중 내게 특히 부족한 건 첫번째, 전문분야에 대한 법률지식이었다. 그러나 주 6일 또는 7일 근무는 내가 빠르게 법률지식을 쌓을 수 있게 해주었다. 하루에도 여러 건이 배당되면,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수십 개의 법령과 판결문을 뒤적거리곤 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지식이 쌓이게 된 것이다.
물론 여전히 부족하다. 내가 모르는 내용은 여전히 많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하는 시간도 여전히 길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지식과 경험은 축적되고 있다. 그렇게 나는 변호사로서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