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무관은 해봤지만, 변호사는 처음이라

사무관 출신 변호사의 대형로펌 적응기 - 1편

by 사무관과 변호사

로펌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막 한 달이 되었을 때였다. 내가 3일 내내 쓴 준비서면*을 보고 파트너 변호사는 아래처럼 말했다(정확히는 말이 아니고 메일이었다).

* 소송 과정에서 법원에 제출하는 문서를 말한다.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담긴다.


"임팩트가 없네요. A 변호사님, 시간이 되면 잠깐 나 좀 볼 수 있을까요?"


여기서 A 변호사는 내가 아니라 나의 선배 어쏘 변호사다. 그러니까 파트너 변호사는, 메일 하나로 나를 훈계하는 동시에 A 변호사를 호출한 것이다. 메일 수신인에는 나와 A 변호사 외에도 다른 변호사들이 있었으니 그들 모두 위 내용을 봤을 것이다.


처음에는 파트너 변호사가 나를 공개적으로 꾸짖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 지난 3일 간의 노력이 "임팩트가 없네요"라는 한 마디로 끝나버리는 것이 허무하기도 했다. 파트너 변호사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내가 로펌에서 했던 일에 관해 소개하기 전에, 변호사 업무가 무엇인지 간략히 설명부터 하겠다.

변호사 업무는 크게 자문(諮問)과 송무(訟務)로 나뉜다.


자문은 말 그대로 법률해석 내지는 법률 관련 컨설팅이다. 개인은 법률자문을 받을 일이 거의 없지만 기업이나 공공기관은 법률자문을 자주 받는다. 예를 들어, 오피스 빌딩을 임차한 기업이 있는데 해당 오피스 빌딩이 파손돼서 수리비용만 수억 원이 나왔다고 해보자. 수리비용은 누가 부담해야 할까? 계약서에 따라 오피스 빌딩을 임차한 기업이 부담해야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오피스 빌딩 소유자 측이 부담해야 할 수도 있다. 계약서상 명확하지 않다면 관련 법률이나 판결들을 살펴봐야 한다. 그뿐 아니다. 만약 우리 고객인 오피스 빌딩 임차기업이 수리비용을 부담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우리 고객의 부담을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을지 향후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최소한 '관련 판결들을 봤을 때 손해배상 산정에 이러저러한 점들을 고려했으니, 고객도 관련된 근거자료들을 미리 확보해놓을 필요가 있다' 정도는 이야기해줘야 한다.


반면 송무는 보통 법원에서 이루어지는 소송과 관련된 업무를 뜻한다. 아래 캡처화면처럼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묘사되는 바로 그 업무이기 때문에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로펌 입사 후 동기들과의 연수를 마친 다음, 나는 곧바로 건설부동산 팀에 배치되었다. 내가 처음에 주로 맡았던 일들은 법률자문이었다.


사실 자문은 내게 낯설지 않았다. 공무원으로 일했을 때 종종 법률자문을 받아봤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법률을 해석할 때에는 판결뿐 아니라 해당 법률을 소관하는 중앙행정기관(소관부처라고도 한다)이나 법제처의 유권해석, 소관부처에서 펴낸 업무편람이나 매뉴얼 등도 참고해야 하는데, 이건 내가 공무원 시절 밥 먹듯이 하던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정말 처음 보는 법이더라도 그 법이 행정에 관한 법이기만 하다면, 나는 그 법이 대강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 그리고 관련된 하위규정이나 매뉴얼 등이 있을지 없을지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서식이나 서술방식이 다르다는 것만 빼면 사실 사무관 때 보고서 쓰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정도였다.


문제는 송무였다. 송무업무는 곧 법원에 제출하는 문서(서면)을 작성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나름의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목차는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목차 안에서 문단 배열은 어떤 순서로 해야 하는지뿐 아니라, 문장을 어떤 식으로 써야 하는지, 심지어는 어떤 어휘를 사용해야 하는지도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소송대리하는 원고가 피고로부터 주택을 임차하고 같은 날 보증금까지 지급했다는 사실관계에 대하여 써본다고 해보자. 이 경우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써야 한다.


"원고는 20XX. X. X. 피고와 사이에, 피고가 소유하는 OO건물 중 1층을 보증금 OOO원, 차임 월 OOO원, 임대차기간 20XX. X. X.부터 20XX. X. X.까지로 정하여 임차하기로 하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하고, 같은 날 위 보증금 전액을 지급하였습니다"


이렇게 쓰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불이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판사를 비롯한 변호사들은 이런 서술방식에 익숙하다. 따라서 위와 같은 암묵적인 규칙에 따라 작성된 서면을 보면, 변호사들은 어디쯤에 어떤 내용이 나올지 예상할 수 있고, 나중에 기억하기도 쉬우며, 무엇이 누락되었는지 잡아내기도 편하다. 판사 역시 마찬가지다. 법원에 제출하는 서면은 기본적으로 판사를 설득하기 위한 글이니, 판사가 읽기 쉽게 쓰여져야 한다. 따라서 서면은 이런 암묵적인 규칙에 따라 작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법률자문과 달리 송무 업무에서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임대차계약 같은 기초적인 유형에 대해서는 로스쿨에서 작성방식을 배웠지만, 로펌에서 접하는 사건들은 항상 새로운 유형이었다. 그러다보니 서면을 쓸 때마다 우리 로펌의 기존 서면들은 어떤 식으로 논리를 펴는지, 법원은 어떻게 판단을 하고 그 판단을 판결문에 담아내는지 공부하기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보면 파트너 변호사의 "임팩트가 없다"는 말은, 송무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내가 다른 서면들을 흉내내어 짜깁기한 서면에 불과한 것임을 꿰뚫었던 말로 느껴진다.




다행히 지금은 이전보다 송무 업무에 익숙해졌다(아직 배울 게 한참 남아있기는 하다). 앞서 말했던 '암묵적인 규칙'에 관해서도, 법원에서 펴낸 실무서적들을 찾아보고 하급심 판결들의 서술방식을 공부하면서 어느정도는 흉내낼 수 있다고 말할 정도는 된 것 같다.


송무 업무의 형식적인 면에 익숙해져서일까. 얼마 전에는 선배 변호사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내가 잡아내어 소송에서 승기를 잡은 일도 있었다(선배 변호사의 업무가 너무 많아 거기까지는 여력이 미치지 못했고,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던 내가 잡아낼 수 있었다).


우리가 피고(분양사)를 대리하여 수행하는 소송이었다. 그 소송에서는 원고(피고로부터 건물을 분양받은 사람)가 투자를 목적으로 건물을 분양받은 것인지가 쟁점이 되었는데, 원고 측 증거자료들을 전부 살펴보던 중 우리에게 유리한 증거를 찾아낸 것이다. 그건 바로 원고와 원고가 선임한 로펌 사이의 수임계약서였다. 일반적으로 다른 변호사들은 수임계약서까지는 살펴보지 않는다. 당연하다. 보통은 사건과 관련된 내용은 별로 없이, 어떤 심급까지 얼마에 대리한다는 내용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고 측이 제출한 수임계약서에는 우리 소송 외에도 다른 건물들에 대해서 소송을 수행한다는 내용이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원고가 비슷한 시기에 건물 여러 채를 분양받았다는 것은, 원고가 실사용 목적보다는 투자 목적으로 분양받았다는 걸 강력히 나타내는 정황이 된다. 원고 소송대리인이 법원에 제출한 서면에서는 원고가 건물을 분양받은 목적이 투자임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깊게 서술한 티가 났지만, 수임계약서까지는 신경쓰지 못한 것 같았다. 우리는 이 점을 지적하는 서면을 제출했고, 원고는 결국 우리의 공격을 방어해내지 못했다.




결국 송무도 법률자문과 마찬가지로 사무관 시절에 하던 일과 본질은 같았다. 설득을 위해 논리를 쌓고, 그 논리가 설득력을 가지도록 자료를 챙기는 일. 형식이 다를 뿐 본질은 같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로펌에서의 하루하루가 조금은 덜 낯설게 느껴졌다.




keyword
이전 07화직장인 출신 로스쿨생의 로스쿨 적응기 - 하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