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관 출신 변호사의 대형로펌 적응기 - 4
그렇지 않아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브런치 글을 공들여 쓰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항상 묵직한 주제를 골라왔고, 내 나름의 성찰까지 이어지게끔 글을 써왔다.
그런데 며칠 전 아내가 내 글이 너무 무겁다고 말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글이 아닌, 소위 '각을 잡고' 읽어야 하는 글 같다는 말이었다. 공무원이었을 때는 보고서를, 변호사가 되고 난 다음부터는 법률자문 의견서나 법원에 제출할 서면만 작성하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글이 계속 진지하고 무거워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가벼운 주제로 글을 써보려고 한다. 바로 '대형로펌 변호사, 드라마와 현실의 차이'.
1. 드라마 에스콰이어
'에스콰이어'는 대형로펌 변호사가 주인공인 드라마다. 그래서 드라마를 잘 안 보는 나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라는 대중매체가 대형로펌 변호사를 어떻게 묘사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스콰이어가 그리는 대형로펌 변호사의 생활상은 실제와는 크게 다르다. 일단 이진욱과 정채연 같은 외모가 없다. 아니, 정확히 하자. 나는 로스쿨과 로펌 그 어디에서도 그러한 외모를 보지 못했다. 애초에 그런 외모를 갖고 있다면 변호사를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그 다음으로 내가 제일 낯설게 느낀 건 강효민(정채연 분)의 사무실이었다. 대형로펌이든 아니든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1인실이다. 변호사에 대한 대우 내지 예우의 성격도 있겠지만, 그보다 변호사는 의뢰인의 비밀을 처리하는 일이 많으므로 비밀을 지킬 수 있도록 독립적인 공간을 준다는 의미가 크다. 원칙적으로는.
그런데 요즘은 대형로펌도 인건비 압박을 강하게 받고 있어서인지 저연차 변호사에게 2인 1실 또는 3인 1실을 주는 경우가 늘고 있다. 대표적으로 김&장과 태평양. 그러나 그 경우에도 독립적인 공간 내에서 구획하는 것이지, 드라마에서처럼 제대로 된 파티션도 없이 4인을 배치해놓지는 않는다(아마 드라마에서는 등장인물들을 한 번에 잡기 위해 모두 한 자리에 모아놓고 파티션도 아주 낮은 걸 사용한 것 같다).
수행하는 사건의 내용도 그렇다. 대형로펌치고는 너무 소규모의 사건들을 수행한다. 일단 개인 사건이 너무 많다. 일반적으로 대형로펌의 수임료는 수천만 원 단위이기 때문에(성공보수는 별도), 개인이 맡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극중 허민정 변호사(전혜빈 분)는 이혼 전문으로 나오는데, 대형로펌에서 이혼 전문 변호사는 사실상 없다고 보면 된다. 가사 전문 변호사가 있기야 하지만, 보통은 이혼보다는 상속이 주력 분야다.
그 밖에 파트너 변호사 사이의 관계나 파트너 변호사-어쏘 변호사의 관계를 고려해도, 현실의 대형로펌과는 아주 큰 괴리가 있다. 그래서 드라마 에스콰이어가 얼마나 현실의 대형로펌을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 굳이 점수를 주자면 10점 만점에 1점 정도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2. 드라마 서초동
'서초동'은 대형로펌에 관한 드라마는 아니지만 최근에 방영된 변호사 드라마다. 그래서 내가 드라마를 보고 "현실은 드라마와 달라!"라고 하더라도, 현실의 서초동에서는 드라마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내가 서초동의 소형 로펌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초동 드라마에서는 변호사들끼리 자주 모여 밥을 먹는데, 내가 다니는 로펌은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샌드위치나 김밥 같은 걸 사갖고 와 사무실에서 따로 먹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나도 미혼이었던 공무원 시절처럼 다른 변호사들에게 적극적으로 식사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광복절 연휴 때 아내가 눈물을 흘리는 걸 본 후, 괜히 약속에 시간을 빼앗겨 퇴근이 늦어지느니 그 시간만큼 빠르게 일을 하고 그만큼 일찍 퇴근하는 걸 택하게 됐다. 변호사는 퇴근시간이 정해져있는 게 아니라 '일을 마쳐야만' 퇴근할 수 있으므로, 다른 펌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진로. 마지막에 주인공을 비롯한 5명은 각각 개업, 사내변, 국선전담, 검사, 교수 준비 등으로 새로운 시작을 한다. 실제로 대형로펌을 그만두게 된다면 비슷한 진로를 가게 된다. 실제로 코로나 시기 어쏘 변호사들이 사내변으로 대거 이직하기도 했고, 파트너 변호사 중에는 퇴직 후 로스쿨 교수가 된 경우가 꽤 있다.
다만 검사는 거의 가지 않는다. 애초에 로스쿨 시절 검사를 지원하는 풀(pool)과 대형로펌을 준비하는 풀이 다르고, 대형로펌을 그만두고 검사를 지원할 동기가 딱히 없기 때문이다(다만 법관을 준비하는 사람은 많다). 최근에는 검사 지원인력이 너무 없어 검찰에서 대형로펌 재직자들을 상대로 경력검사 지원을 독려하는 전화를 돌렸다는 괴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처럼 변호사 드라마는 현실과 많이 다르다. 물론 현실과 같은 부분도 있고, 공감가는 부분도 많지만, 드라마라는 장르의 특성상 극적 재미를 위해 과장되는 부분이 훨씬 많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화려한 사무실, 잘생기고 예쁜 변호사들, 드라마틱한 재판 장면을 기대하겠지만, 실제 변호사의 삶은 대부분 사건 기록을 읽고, 서면을 쓰고, 회의와 전화로 하루를 보낸다(당장 나만 하더라도 사무실 창문으로 서울 시내가 잘 보이지만, 입사하고 단 하루도 블라인드를 걷은 적이 없다).
다만 이런 차이가 꼭 나쁘진 않다. 오히려 나 같은 변호사는 "저건 현실과 다르네"라며 웃으며 드라마를 볼 수 있고, 변호사가 아닌 시청자 입장에서는 흥미를 느낄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건 드라마는 드라마로서 즐기면 된다는 점이다. 현실의 변호사는 드라마처럼 매일 사건 현장에서 활약하는 직업은 아니지만, 드라마 덕분에 변호사의 세계가 보다 친숙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