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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와 의뢰인 사이의 소통에 관하여 - 변호사의 입장

사무관 출신 변호사의 대형로펌 적응기 - 8

by 사무관과 변호사

변호사의 일은 사람과의 소통으로 시작해 소통으로 끝난다. 따라서 나는 지난 글에서 변호사의 소통 능력이 중요하다고 한 바 있다. 그래서 오늘은 '소통'에 관하여 써보려고 한다. 변호사 입장에서 의뢰인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그리고 의뢰인이 변호사를 잘 활용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지에 대해 작성할 생각이다.




1. 변호사가 의뢰인에게 바라는 점


1) 정말 급하지 않다면 업무 연락은 메일로 하자


공무원 조직과 로펌 사이 가장 큰 차이점을 꼽자면 단연 소통수단이다.

공무원 시절에는 같은 부서라면 대면으로, 다른 부서라면 주로 전화나 공문으로 업무연락을 했다. 메일을 보내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전체 메일이 아닌 이상에야 대개는 먼저 전화로 협의한 후 확인 차원에서 메일을 보내는 정도였다.

반면 로펌에서는 메일이 기본 연락수단이다. 전화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한다. 내가 로펌에 처음 입사했을 때, 공무원 시절에 그랬듯이 내선번호로 업무전화를 하니 상대방이 당황해하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변호사들은 대부분의 업무 연락 내지 소통을 메일로 한다. 과장을 좀 보태면 99%라고 봐도 된다. 따라서 의뢰인(내가 다니는 로펌에서는 보통 '고객'이라고 한다)이 전화로 업무연락을 하면 변호사 입장에서는 다소 낯설게 느낄 수 있다. 물론 고객의 편의가 우선이지만, 변호사로부터 정제된 대답을 듣고 싶다면 전화보다는 메일로 질문하는 편이 낫다.


의뢰인이 하는 대부분의 질문은 즉석에서 답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법령과 판례를 찾아봐야 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변호사 1명이 처리하고 있는 사건이 못해도 40~50건은 되기 때문이다(나만 하더라도 현재 처리하고 있는 사건이 송무, 자문 합쳐 70건이 넘는다). 변호사라고 사실관계를 항상 외우고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느정도 기억은 하지만, 즉문즉답으로 정확한 답변을 하기는 어렵다.


또, 전화가 아닌 메일로 연락한다고 해서 회신이 크게 늦는 것도 아니다. 내가 다니는 로펌에서는 내부로부터든 외부로부터든 일단 메일을 받았다면 '1시간 내 회신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예: 출장, 재판 출석 등) 사정을 설명하고 급한 일일 경우 휴대폰으로 연락달라(번호 포함)는 내용의 메일이 자동회신되게끔 설정해놓는다.


이처럼 변호사에게 메일은 단순한 편의를 넘어, 업무 효율과 정확성을 동시에 지킬 수 있는 장치다.


2)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생각된다고 해서, 변호사에게 사실관계를 숨기지 말자


위 1)은 기업고객과 개인고객 모두 해당되지만, 2)는 보통 개인고객에게 해당된다. 기업고객은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사실관계도 모두 변호사에게 공유한다. 기업고객은 보통 '이러이러한 사실관계가 있는데, 여기서 손해배상액을 최소화하려면, 또는 아예 면책되려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는 취지로 질의를 한다. 기업고객의 질의에는 감정이 전혀 섞이지 않고, 오로지 냉철한 손익계산만이 존재한다.


반면 개인고객은 의뢰에 감정이 섞이거나, 사안을 손익의 관점이 아닌 선악(善惡)의 관점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개인고객은 보통 '나는 선(善)한 피해자이므로 이익을 보아야 하고(또는 손해를 입지 말아야 하고), 상대방은 악(惡)한 가해자이므로 손해를 입어야 한다(또는 이익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100% 선한 피해자도, 100% 악한 가해자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점을 조금만 달리한 것만으로 피해자와 가해자가 바뀌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개인고객들은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사실관계를 변호사에게 아예 얘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변호사를 믿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법원이 자신을 안 좋게 생각하여 불이익을 줄 것 같다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변호사 입장에서는 사실관계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그에 맞는 소송전략을 고민할 수 있다. 또, 법을 잘 모르는 사람은 그 사실관계를 불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도, 변호사 입장에서는 오히려 고객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느모로 보나 변호사에게 솔직하게 사실관계를 밝히는 게 낫다는 뜻이다.


얼마 전 일이다. 고객이 기업(A)이긴 했지만 주주가 1인밖에 없어서 사실상 그 주주 개인(B)이 고객이나 마찬가지인 사건이었다. A는 몇 년 전 수십억 원의 대출을 받았는데, 그 채권자(C)가 A를 상대로 대출을 갚으라는 청구를 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A는 우리에게 그 대출금을 모두 변제하였다며, C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A의 말을 믿고 이에 맞춰 서면을 작성하고 제출했다. 그런데 우리 서면에 대한 C 측의 반박서면을 보니, A가 대출금을 계좌로 이체하자마자 C 쪽에서 일하던 B의 배우자(D)가 위 금액을 모두 자신의 계좌로 다시 이체한 상황이었다. 이를 과연 정상적인 변제라고 볼 수 있을까? 결국 우리는 변제 주장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우왕좌왕한 결과 A는 그 소송에서 패소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우리가 위와 같은 사정을 알았다면 다른 논리로 서면을 작성했을텐데, 아무것도 못해보고 당한 꼴이었다. A(내지 B)의 말을 그대로 믿은 나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변호사는 의뢰인의 선악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고, 의뢰인을 위해 법률에 관한 전략을 구상하는 대리인이다. 변호사에게 솔직하게 말해줘야 변호사가 제대로 된 전략을 고민할 수 있다.


3) 단편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자


요즘은 법률정보가 넘치는 세상이다. 사실 법률정보는 인터넷 검색만으로 쉽게 얻을 수 있다. 변호사들이 경쟁적으로 블로그나 정보 글을 올리다 보니 변호사의 간단한 자문 정도는 무료로 찾아볼 수도 있다. 최근에는 AI가 발달하다 보니 질문을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기도 한다. 겉으로 보면 변호사가 사건을 검토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정보'가 아니라 '맥락'이다. 같은 법령이나 판결이어도 사건의 사실관계에 따라 적용여부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결론도 완전히 달라진다. 인터넷 글이나 AI 답변을 기계적으로 취합한다면 그 미묘한 차이를 반영하지 못한다.


역시 내가 얼마 전 경험했던 일이다. 기업고객이었는데, 자칫하면 수십 억 ~ 수백 억 원의 손해배상을 할 처지였다. 따라서 손해배상책임을 지는 게 확정적인지, 만약 책임을 지는 게 확정적이라면 배상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에 대해 우리에게 자문을 구한 상황이었다. 이를 미리 검토해 놓아야 검토결과를 토대로 상대방과 협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객은 내부적으로,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자신들이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할 가능성이 높다고 이미 결론짓고 있었다(심지어 고객의 사내변호사가 검토한 결과였다). 그런데 실제로 위 대법원 판결의 사실관계를 찾아보니(1심, 2심 판결들까지 찾아보면 사실관계가 자세히 나온다), 본건과는 중요한 사실관계가 크게 달라 본건에 적용할 만한 판결이 아니었다. 오히려 본건과 유사한 사실관계에서 고객에게 유리한 취지로 판단한 하급심 판결들을 여럿 찾을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하지 않을 가능성이 오히려 더 높다고 회신했고, 고객은 유리한 입장에서 상대방과 협상할 수 있었다.


이처럼 법률관계는 단편적인 정보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고민되는 것이 있다면 인터넷이나 AI에만 너무 의존하지 말고, 꼭 변호사에게 검토를 받아보자.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분량상 의뢰인이 변호사를 잘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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