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의 불행한 소원이 이루어진 날

3화

by 희지

할아버지에게 머리카락이 뜯기고

이리저리 내동댕이 쳐지는 할머니를 숱하게 보며

처절하게 외쳤던 어린아이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였다

자그마치 무려 8년이 걸렸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허망했으며

삶의 마지막 장면은 처참했다


할아버지는 원래도 욕실에서 많이 넘어지곤 했다

욕실 바닥에 흥건한 피를 아무렇지 않게

파란 걸레로 닦아내던

할머니의 얼굴에선 늘 아무 표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쿵하며 소리가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렸고

또 욕실에서 할아버지가 넘어졌다

그날은 아빠와 심하게 싸운 후

유독 소주와 막걸리를 잔뜩 마신 날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할머니는 아무런 표정 없이

욕실 밖까지 흘러나온 피를 걸레로 닦아내고 있었다

아빠는 보지 말라며 방으로 들어가라고

한 손을 위로 든 채 크게 휘휘 저으며

표정은 화가 나 있는 채로

우리 자매를 향해 큰 소리를 질러댔다


겁에 질린 나와 동생은 방 안으로 숨었다

이미 그 장면을 본 뒤여서

소용없는 포효였지만 말이다


할아버지는 119에 실려갔고

그렇게 두근 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잠에 들었다

다음 날도 어김없이 학교에 갔다

학교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할아버지가 위독하다고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이었을

그날에도 아빠는 나의 눈도 쳐다보지 않으며

“갈 거야?” 이 한 마디뿐이었다

그 단순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면

임종도 못 볼 뻔했던 것이다


차를 타고 응급실로 향할 때 내 가슴은 쿵쿵

머리까지 온몸이 울리며 온몸이 벌벌 떨렸다

그렇게 미워했어도

요구루트 사다 주는 할아버지,

스티커 길거리에서 주우면 혹시나 해서

나 좋아할까 봐 쑥스러워하며

쓰레기를 주어온 순진한 할아버지,

나만 보면 시도 때도 없이 “밥 먹었냐?”

늘 물어봐준 할아버지와


매일 술이며 담배를 태워대는 할아버지,

술만 잡수시면 변하는 할아버지와

나를 사랑으로 대해준 다정하고

조용히 나를 사랑해 주던 할아버지 사이에서

수많은 갈등을 하다 미움을 택한 나였지만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초점 없이

입을 가늘게 벌린 채로 멍하니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막상 마주하니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서러웠다

그리고 누군가의 첫 죽음을 곧 직접

대면해야 한다는 현실이 무서웠다

증오했지만 사랑했던 할아버지의

마지막이 너무 서글펐다


나중에 응급실에서 할아버지를 보았을 때

입 안에는 바닥에 세게 부딪히며 떨어진

이빨 몇 개와 이빨과 잇몸과 분리되면서

나온 피가 살짝 고여있었다

응급실에서 그 깨진 이빨들도 입 안에서

빼주지 않았던 모양이었나 보다


할머니는 눈을 계속 감겼다

아직 감지도 않을 때였는데

‘속으로 이 여편네가’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지 않을 정도로 눈을 쓸어내리며 감겼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얼른 눈을 감는 게 좋았을까

난 아직도 할머니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할아버지 제사를 지낼 때마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 좋아하는 고기를 못 준 게

신경 쓰인다고 말하곤 하신다

불행한 사랑이었다 해도

이러한 사랑도 다른 모양의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아직 알 듯 말 듯 알 수가 없다)


기계에서 심장 박동 숫자가 낮아지며

곧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며

알람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원래도 잘 안 들리는 가는귀,

갈 때마저도 안 들릴까

동생도 나도 할아버지 “사랑해요” “고생했어요” 라며

마지막으로 귀에 대고 울면서 소리쳤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모두 도착해 왔을 때쯤

할아버지는 말 한마디 없이,

한글 쓸 줄도 몰라 유언 한 장 못 쓴 채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영혼이 떠나간다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눈 하나 깜짝할 새에 할아버지의

시계의 시침, 분침이 모두 멈춰버렸다

“늙으면 죽어야지”를 입에 달고 살던 할아버지가

죽을 까봐 늘 노심초사했던 그 순간들도

모두 한 순간에 재가 되어버렸던 장면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인형처럼

온기가 사라지고 한순간에 시체가 되어

병원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그 후 응급실에서 나와 장갑을 벗고

땀에 젖은 손을 씻어내며 펑펑 울었다

집에 가서도 엄마와 우리 자매는

엄마 방에 셋이 모여

밤새 벌벌 떨며 한참을 울었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3화기억의 유리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