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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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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누구나 나이가 들어가며 이름이 하나 둘 늘어가기 마련이다.

엄마로, 아내로, 또는 아빠로, 남편으로의 삶이 더해진다.

삶은 그렇게 호칭을 덧입히며 조금씩 달라진 얼굴을 만들어 간다.


그래서일까.

누가 "여름씨"라고 부르면 나는 너무 어색하고 이상한 기분이 든다.

분명 내 이름인데, 낯설고 멀게만 느껴진다.


그동안 나는 늘 '딸'이었고, '아내'였고, '엄마'였으며 일터에서는 또 다른 호칭으로 불리곤 했다.

그 호칭들 속에서 나는 열심히 살아왔지만, 정작 내 이름은 뒤편으로 밀려나 있었다.


떠올려보면, 한때는 내 이름을 부르는 이가 많았다.

학교 다닐 때, 직장에 다닐 때, 친구들과 어울릴 때.

그때의 나는 분명히 나였고, 내 이름은 나를 지칭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호칭이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무게가 짙어질수록 내 이름은 점점 희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친구 엄마가 불쑥 내 이름을 불렀다.


"여름씨."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고, 동시에 아주 오래된 기억을 꺼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내 이름이 이렇게 낯설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놀랐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호칭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나에게 주어진 역할에 몰두하며 내 이름을 살아내지 못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이름을 부른다는 건, 단순히 소리를 내뱉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를 불러내는 일이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나를 증명해 주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언어, 바로 내 이름.

어느새 잃어버린 나의 이름.

이제는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그 이름.

브런치에서 필명을 이름 그대로 쓰다보니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께서 불러주셔서 이제는 제법 익숙해 졌답니다 :)


아마 많은 이들이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우리 모두 한 번쯤은 이름을 잃은 채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 이름은 사라진 게 아니라, 우리 안에서 다시 불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혹시 당신도 잊고 지낸 이름이 있다면, 이제 그 이름을 불러내는 여정을 시작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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