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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애기 엄마'

09

by 여름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단지.


그 마을은 노인도 어린아이도 유난히 많은 동네였다.

오래된 벚꽃 나무가 만들어준 아름다운 꽃길과 놀이터 속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어르신들의 따스함이 그 마을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그 시절 아이들 아빠는 늘 바빴기에 얼굴 보기가 힘들었고,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못한 채, 아이 셋을 온전히 혼자 힘으로 키워야만 했다.

게다가 경제 활동도 해야 했으니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피폐해진 상태였다.


이혼 후 혼자가 되었다고 해서 아이 셋을 케어하는 일이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혹독하게 단련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아이들이 많이 큰 이유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혼이 오히려 내게 커다란 해방감을 안겨주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제 와서 그때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자니 마음 한켠이 짠해 온다.

삶에, 육아에 치여 지칠 대로 지친 나의 모습.


사실 그 당시는 얼만큼이 힘든 건지, 어디부터 힘들다고 해야 하는지, 내가 힘들어하는 게 맞는 건지, 그 어떤 기준도 무엇도 없었다.

그저 인내하며 버틸 뿐이었다.


앳된 얼굴, 작은 몸뚱이에 셋째를 아기띠에 안고, 한 손에는 둘째가 탄 유모차를, 또 한 손은 첫째 아이 손을 잡는다.

셋째까지 키워내느라 낡을 대로 낡은 유모차 손잡이에는 아이들의 학교 가방과 어린이집 가방 등 온갖 짐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한 손의 핸들링으로 손목은 시큰거렸지만, 그 상황에서도 나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아이들 등원 시간이나 하원 시간에는 곳곳에서 동네 어르신들을 마주치게 된다.

때로는 엘리베이터에서, 때로는 놀이터 앞 벤치에서, 때로는 어린이집 앞을 지나다가.


그때마다 나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인사드리고, 짧은 안부도 나누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 여겼다.

그런 내 모습을 보게 된 친구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여름이 여전하구나, 너 이러다가 집에 가려면 하루 죙일 걸리겠다."


아이들의 동선이 달라져 늘 다니던 길이 아닌, 다른 경로로 돌아서 다닐 때였다.

우연히 옆 동 어르신을 마주쳐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인사를 드렸다.


"아우, 애기엄마! 난 애기엄마 이사 간 줄 알았잖아. 잘 지냈어?

안 보여서 한참 찾았잖아, 애기엄마."


그렇게나 반갑게 맞아 주시니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일흔이 넘은 어르신이 나를 붙잡고 한참 동안 쌓인 이야기를 늘어놓곤 하셨다.


하루는 더 놀겠다는 아이들을 겨우 달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스름한 복도 끝 우리 집 현관 손잡이에 거뭇한 무언가가 걸려 있는 게 아닌가.


어떤 날은 빵이, 어떤 날은 만두가, 어떤 날은 손수 만든 반찬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이웃 어르신들의 따스한 손길이었다.

처음에는 누가 가져다주었는지 몰라 이걸 받아도 되나, 한참을 망설였다.


"애기 엄마 생각나서."

"반찬을 너무 많이 했지 뭐야."


서로 약속한 것도 아닐 텐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렇게 사랑을 나누어 주시곤 했다.


아마도 힘겹게 아이들을 키워내는 모습이 여간 눈에 밟히는 게 아니었으리라.

어쩌면 당신들의 젊은 시절, 그립기도 하고 사무치기도 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던 건 아닐까.

혹은 어른들을 보면 먼저 허리 숙여 인사하던 우리 집 꼬마들이 그저 예뻐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딸 같다며. 손녀 같다며.

그때 나를 불러주시던 그 이름 '애기 엄마'

그 부름 속에 담긴 따스한 정과 위로가 지금도 사무치게 그립다.


그 시절 저를 '애기엄마'라 불러주신

옆집 아주머니, 끝 집 할머니, 할아버지, 이쁜 할머니 그리고 옆동 할머니.

모두 건강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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