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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아름이, 아롱이, 포도, 사과...
하늘이, 아름이 빼고는 이게 사람의 이름일까 싶은 이 단어들은 놀랍게도 나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이름이 특이하다고 해서 모두가 내 이름을 기억해주는 건 아니었다.
어릴 적에는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일이, 성인이 된 뒤에 유독 자주 벌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닐 때의 일이다.
나는 국내 및 일본 여성의 속옷을 개발하고 제작하는 회사의 디자이너였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우리 회사의 노처녀 모대리님은 나를 유독 예뻐했었다.
나는 그저 까칠한 대리님이 무서워 묵묵히 내 할 일을 찾아 열심히 하던 직원이었다.
외근도 많고, 허드렛일도 많은 일이었지만 나는 불평, 불만 없이 내 임무를 해냈고,
때로는 대리님의 사적인 요구까지도 흔쾌히 들어주곤 했다.
대리님은 자신의 친한 사촌 언니에게 종종 내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었다.
하루는 대리님이 누군가와 메신저를 주고 받다가 깔깔대며 나를 불러 대화 내용을 보여주었다.
대화 내용은 이랬다.
"너희 회사에 간식 보냈어. 그 친구랑 나눠 먹어."
"누구?"
"그 왜 사과인지 포도인지, 그 애."
"아, 여름이?"
대리님은 배꼽을 잡고 웃는데 나는 그저 입꼬리만 끌어올리며 억지 웃음을 지을 수 밖엔 없었다.
사과라니... 흑 너무해.
결혼 전, 남자친구가 자신의 할머니께 나를 소개하고 싶다며 자리를 마련했다.
할머니는 그 당시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 라는 유행어를 낳은 드라마의 열렬한 팬이셨다.
이미 드라마가 방영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재방송으로 자주 시청하신다고 했다.
당연히 그 드라마의 주인공인 김하늘을 좋아하셨고, 나를 보자마자 하늘이를 닮았다며 너무 반가워 하셨다.
"네? 김하늘요?"
남자친구는 당황하는 나를 보며 '풉'하고 연신 웃음 참는 시늉을 했다.
닮지도 않은 연예인을 닮았다는 말이 좀 민망하고 부끄러웠지만 그만큼 할머니가 나를 예쁘게 보셨다는 뜻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할머니는 끝내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늘 나를 하늘이라 부르셨다.
결혼 후, 같은 동네에 동창 친구의 어머니가 살고 계셨다.
그 당시 안 좋은 일을 겪으셨던 터라 길에서 만나면 안부도 묻고, 서툴지만 손도 잡아드리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고맙다며, 짧은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런데 한 번도 내 이름을 정확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정말 단 한 번도.
"그래, 아론아." 혹은,
"그래, 아롱아."
처음에는 '어머니, 저 여름이예요.'라고 정정해드렸지만, 수차례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나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아론이든 아롱이든 뭐 어떠랴.
'나'는 그저 '나'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