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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에 쓰인 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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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이름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초등학생 시절, 웃지 못할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


그때가 4학년이었는지, 5학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우리 집은 작은 마당이 있는 2층집의 1층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마당 한 켠에는 공동 화장실이 있었고, 그 안의 작은 창문은 대문 옆 담장 밖을 향하고 있었다.


어느 평화로운 오후, 나는 화장실에 가기 귀찮아 계속 참고 참다가는 결국 휴지를 돌돌 말아 마당으로 나갔다.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자, 때마침 담장 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오고 가는 대화 중에 내 이름이 들리는 듯해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야, 여기다가 적어."

"좀 더 크게, 더 진하게!"


더러는 키득키득 대는 소리도 섞여 들렸다.


'어라? 이 목소리는 우리 반 최왕진이랑 박창훈이잖아?'


화장실 바닥은 땅보다 높아,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일어서면 천장에 머리가 닿을락 말락 했다.

그 말인즉슨, 내가 일어서기라도 하는 날이면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두 남학생과 눈이 마주칠 위기에 놓여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혹시라도 열려있는 창문 밖으로 내 존재를 들킬까 봐 숨소리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점점 다리가 저리고, 식은땀이 나며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다.


'아니, 쟤넨 남의 집 화장실 담벼락에서 도대체 뭐 하는 거야?? 힘들어 죽겠네, 정말.'


나는 코에 침을 바르며 눈을 질끈 감았고, 있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그대로 그들이 돌아갈 때까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조심스레 담장을 확인했던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커다란 하트 속에 내 이름 석 자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필로 삐뚤빼뚤 겹겹이 그려진 이름이 낯부끄러웠지만, 왠지 싫지 않았다.


하지만 보수적이고 엄했던 아빠가 이 낙서를 보는 날이면 오히려 내가 혼이 날까 봐 더럭 겁이 났다.

얼른 지우개를 들고 나와 지워봤지만 허옇게 자국을 남기며 미끄러질 뿐이었다.

내가 지우개로 지운 흔적이 더 강조되어 보이는 듯했으나, 다행히 내 우려와는 다르게 그 낙서에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낙서를 한 범인을 알았음에도 두 남학생을 추궁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되묻기라도 하는 날이면...?


"아, 내가 그때 마침 X을 누고 있었거든."


이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행히 그 이듬해 대대적인 집수리가 있었고, 우리는 집 내부에 신식 화장실을 갖추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낙서는 그 집을 떠나기 전인 고등학교 1학년까지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웃지 못할 추억을 떠올리자니, 그 시절이 새삼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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