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마법크레파스
화원 안은 고요했지만, 잎새들은 마치 작은 손길처럼 삼신의 치맛자락을 흔들었다.
별님이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삼신을 올려다보았다.
삼신은 잠시 눈을 감고 긴 숨을 들이켰다.
별님이를 향한 시선에는 오래된 바람과 수많은 아이들의 울음이 겹쳐 있었다.
삼신의 손끝에서 은은한 빛이 피어오르더니, 작은 별가루가 흩날리며 공기 속에 스며들었다.
그 빛이 서서히 한 점으로 모여 별님의 앞에 다가왔다.
"별님아... 이구슬은, 정말 네가 필요할 때만 쓰거라."
삼신은 옥빛으로 은은히 빛나는 작은 구슬을 별님의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온기.
마치 오래전부터 별님의 것이었던 듯, 손금 사이에 꼭 맞게 들어앉았다.
"이게 뭐예요?" 별님이가 물었다.
할머니는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간절한 순간이 오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게다."
삼신의 눈가에 오래된 슬픔이 번졌다. 마치 이미 별님이가 어떤 소원을 빌지 알고 있다는 듯이
노을이를 만난서 별빛화원으로 돌아온 그날 밤.
별님이와 노을은 창밖으로 보며 서로 기대앉아 있었다.
어디에도 닿지 않는 아이, 이름도 없이 떠도는 아이.
그게 바로 별님이었다.
엄마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듯 저려왔다.
별님이는 본능처럼 구슬을 꼭 움켜쥐었다.
그러자 손 안에서 구슬이 부드럽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작고 둥근 파란색 크레파스 한 자루가 남았다.
별님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별님이가 떨리는 손으로 그 크레파스를 꺼내어 허공에 선을 그었을 때,
어둡던 공간이 반짝이는 별빛 그림으로 가득 차올랐다.
길이 없던 곳에 길이 생기고, 말할 수 없던 마음이 색깔이 되어 피어났다.
이내 크레파스는 다시 옥구슬로 변해버렸다.
아쉬운 마음에 별님이는 두 손으로 구슬을 꼭 쥐었다.
그러자 구슬이 사르르 녹아내리며 크레파스로 변했다.
별님이는 눈이 동그래지며 놀라서 소리쳤다.
"이거... 진짜 내 거 맞지?"
허공에 쓱쓱 그어보니, 파란 선이 공기 위에 남았다.
신기해서 하트도 그리고, 동그라미도 그려봤다.
노을빛처럼 주황색 선이 번쩍이더니, 동그란 공이 ‘퉁!’ 하고 떨어졌다.
"꺄하!" 별님이의 웃음이 별빛 알갱이처럼 튀어 올랐다.
이내 별님이는 두 손으로 공을 번쩍 들어 올려 껑충껑충 튕겼다.
곧이어 별님이가 핑크빛 선을 그리자, 솜사탕이 손에 착 달라붙듯 나타났다.
별님이는 허겁지겁 입에 넣으며 웃었다.
"우와, 내가 태어나서 처음 먹는 거야. 진짜 달콤해! 노을아, 이거 먹어볼래?"
옆에서 지켜보던 고양이 노을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별님아, 이건 네 마음이 만든 거라서... 진짜 달콤한 건 아니야."
별님이는 노을이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연신 그림 그리기에 빠져버렸다.
별님이는 다시 크레파스를 휘두르며 작은 인형, 반짝이는 별 풍선, 꼬마 자동차까지 척척 꺼내놓았다.
노을이는 툭툭 발로 인형을 건드리며 피식 웃었다.
"완전 놀이터네. 넌 혼자서도 잘 노는구나."
별님이는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응! 이제 뭐든 다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자~이번엔 무지개 미끄럼틀.
별님이는 허공에 쓱쓱 그리더니, 순식간에 반짝이는 길이 뻗어 나왔다.
"노을아, 같이 타자!"
노을이는 못 말린다는 듯 꼬리를 휘두르더니, 별님이 옆에 딱 붙어 미끄럼틀을 타 내려왔다.
별님이의 웃음소리가 반짝이는 별빛 속으로 흩어졌다.
별님이는 무지개미끄럼틀을 신나게 내려오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끼얏!"
발이 땅에 닿자, 잠깐 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웃음은 금세 넘어버렸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함께 미끄럼틀을 타는 친구도, 손뼉 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알록달록한 놀이터 속에서, 웃는 건 자기 혼자뿐이었다.
별님이는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나도... 엄마랑 같이 놀면 좋겠다..."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비어 가는 기분이었다.
이내 풀이 죽은 별님이는 바닥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손에 쥔 크레파스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놀아도, 마음속에 텅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 노을아."
"응?"
"있지... 엄마도 그리면... 나올까?"
별님이의 눈망울이 살짝 흔들렸다.
순간, 크레파스 끝이 허공에서 덜덜 떨렸다.
노을이는 앞발을 들어 별님의 손등을 살짝 누르며 고개를 꺄우뚱했다.
"별님아, 네가 그린 공이랑 미끄럼틀은 진짜 가지고 놀 수 있긴 하지.
하지만 그건 네 마음을 다 채워주진 않아. 엄마는 그려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야."
별님이는 말없이 크레파스를 꼭 쥐었다.
솜사탕처럼 달콤했던 웃음이, 이상하게도 짠맛으로 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