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새벽의 안개가 걷히자, ‘별빛화원’ 앞에 작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반짝이는 머리핀을 단,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유리문 너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보랏빛 수국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떨구었고, 햇살이 내려앉자 아이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여기가… 맞나 봐.”
아이는 속삭이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쪽에서 나오는 꽃향기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아이 이름은 ‘별님’.
전날 밤, 안갯속에 사라진 별 모양 씨앗이 세상에 돌아온 모습이었다.
화분에 물을 주던 삼신이 고개를 돌리자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이고, 심장이야... 너, 여기 어떻게 온 거야?"
"나 할머니 따라왔지~ 아까 나 보고 있었지? 그런데 왜 모른척했어?"
"이 녀석아, 이승사람이어도 알은체 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저승 가는 너를 내가 어찌 인사하누?
별님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치... 그래도..."
"저승이 가 데리러 왔을 텐데? 안 왔던?"
"응, 안 왔던데?"
"아이쿠. 저승사자, 이놈. 또 일은 빼먹었구만..."
삼신은 허둥대며 이마를 짚었다.
별님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할머니, 괜찮아. 나 명부에 없어서 저승아저씨 몰라. 안 걸릴 수 있어~"
"어허. 이럴 어쩌누..."
삼신은 여간 난처한게 아니었다.
별님은 꽃잎을 쓰다듬으며 해맑게 웃었다.
"할머니 나 그냥 조금만 더 놀면 안 돼? 아까는... 눈떳는데 금방 없어져버렸잖아..."
삼신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가, 저승이 귀가 밝아서 벌써 눈치챘을 거다. 네가 여기 오래 머물면 금방 찾으러 올 게야."
삼신이 목소리를 낮췄다.
별님이는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였다.
"그래도... 잠깐만... 나 정말 기대하고 왔단 말이야..."
그런 별님이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는 삼신은 잠시 눈을 감았다.
잠시동안 말이 없던 삼신은 큰 결심을 한 듯 별님이에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정말 잠깐이다! 며칠 안에 반드시 찾을게야."
별님의 눈이 동그래졌다.
"진짜? 고마워. 할머니."
그 순간, 화원 밖 어딘가에서 바람이 스쳤다.
삼신은 그 바람에 섞인 기운을 읽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승사자가 이미 근처에 와 있는지도 몰랐다.
삼신은 한숨을 쉬며 물조리개를 내려놓았다.
"에휴, 네 고집은 씨앗 때부터 알았지. 잠깐이다 잠깐만... 하지만 저승이가 나타나면, 나도 못 막는다.”
세상구경할 기대에 부푼 별님은 꽃향기 속에 몸을 파묻었다.
잠시뒤, 고무나무 분갈이를 마친 삼신은 손의 흙을 털며 물었다.
"별님아! 자~ 이제 솔직하게 말해보렴."
왜 굳이 여길 찾은게냐?"
삼신의 목소리는 느릿했지만, 눈가에는 오래된 주름이 한 겹 더 깊어졌다.
별님은 창밖의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유리문밖에서 동네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저렇게 달릴 수 있다면, 넘어져도 울 수 있다면,
숨이 차서 헉헉대도 좋을 텐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공기 속에 부유하다가,
자기에게는 닿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순간.
아이의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
별님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마치 저 아래 강물 속에서 햇빛이 번쩍 튀어 오르는 순간처럼.
삼신의 목소리엔 오래된 피로와 연민이 섞여있었고,
마치 수많은 생을 배웅해 온 손이 또 한 번 망설이는 듯 말했다.
"그건 내가 정할 일이 아니란다. 네 명이 다하지 않았다면... 길이 열릴지도 모르지..."
별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으로 땅바닥을 긁적였다.
나 자전거도 타고 싶고,,, 숨박꼭질도 하고 싶어. 나 그런거 한번도 모해봤어."
"자전거?"
"응... 나 세상에 와서 아무것도 못 해봤어.
햇볕도 따뜻하게 못 쬐어봤고...맛있는거.. 그래 나 그거 솜사탕. 그것도 먹어보고싶고.
아무도 내이름 크게 불러준적도 없어...
그냥... 자전거도 타보고, 예쁜 옷도 입어보고, 친구도 사귀어보고 싶어. 저 애들처럼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
삼신은 한숨을 섞으며 손에 들고 있던 엽전 한 닢을 천천히 굴렸다.
"왜? 다시 태어나고 싶으냐?"
할머니의 물음에 별님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에 오래전 풍경이 번졌다.
따뜻한 품, 나지막한 자장가, 창문 틈으로 들어오던 햇살.
그 모든 게 너무 짧았다. 마치 장난처럼 빼앗겨 버린 시간.
"응~ "
별님의 시선은 창밖아이들에게로 이어졌고
한동안 말이 끊겼다. 아이들 웃음소리는 여전히 멀리서 들려왔다.
삼신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간절한게로구나..."
별님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고 삼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
"할머니. 근데 이번에는 내가 엄마를 고를래"
"뭐? 예끼 이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삼신은 눈썹을 추켜올리며 지팡이를 땅에 ‘툭’ 하고 찍었다.
"부모자식의 인연이라는 것이 다 인연의 업보대로 맺어지는 거를 어찌 네가 결정한다는 게야?"
별님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고는, 손가락으로 바닥에 원을 그리며 중얼거렸다.
"할머니는 할 수 있잖아. 그럼 할머니는 왜 마음대로 결정하는데?"
"이놈아 그렇게 한다고 치자, 어차피 다시 태어나면 지금 기억은 사라지는데 무슨 소용이더냐?"
삼신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별님은 잠시 말이 없었다가, 천천히 웃었다.
"기억 안 나도 괜찮아.그냥 나는 진짜... 신나게 놀고싶어."
그리고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척 얹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더니 씩씩대며 따져물었다.
"할머니가 아무렇게나 막 뽑으니까... 나는 자전거도 못타고, 엄마 손잡고 시장 가본적도 없잖아
이번엔 내가 고를래"
"그래야 내가 다시 태어나도 재밌게 놀지~"
삼시은 어이없다는 듯 코로 ‘훅’ 숨을 내쉬었다.
"그래그래, 내 이번엔 잘못했다. 다음번엔 꼭~ 면접 보고 점지해 주마"
할머니가 입가를 씩 올리며 말했다.
"아니 아니, " 별님은 빠르게 손을 저었다
"할머니 마음대로 뽑지마. 나한테도 물어봐야지..."
"다음에 말고, 지금. 지금 내가 할거야"
"허허 이 놈 두,,,"
할머니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엔 경계와 호기심이 스며 있었다.
"아가. 내가 더 해줄 수 있는 건 없단다."
삼신은 잠시 눈을 감고 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내 결심한 듯 손바닥을 무릎에 톡 치더니, 허공을 휘저었다.
반짝이는 꽃이 담긴 작은 목걸이가 손바닥 위에 나타났다.
삼신은 그것을 별님의 목에 살며시 걸어주었다.
"이건 별이슬초란다. 이 빛이 꺼지면, 네 길도 저물겠지..."
다만, 사흘 동안만 저승사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너를 지켜줄 수는 있지."
삼신은 마지막으로 별님의 뒷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남은 시간이 짧다 생각 말거라. 진짜 마음을 찾기엔 충분한 시간일지도 모른단다."
화원의 푸른 잎들이 별님이를 응원하듯 바람에 흔들렸다
별님은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삼신은 빙긋 웃으며 눈을 가늘게 찡긋했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남긴 채 바람결에 스며들 듯 사라졌다.
"엄마를 고른다 했지? 기억하거라"
"숲 속의 저 큰 나무가 바람에 흔들린다고 해서 나무가 아닌 건 아니란다."
목에 걸린 별이슬초의 밝은 빛 때문이었을까?
별님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그 두근거림은 멀리 다른 누군가의 심장에도 닿아 있었다.
현주였다.
창밖에는 바람에 나뭇잎이 흩날렸지만, 그녀의 시선은 종이연습장 위에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다.
거리의 소음들조차도 물 밖의 소리처럼 멀게만 들렸다.
이내 손끝에 힘이 들어가자 공책 귀퉁이에 자꾸만 같은 글자가 새겨졌다.
ㅡ 엄마 ㅡ
그리고 또 한 사람 진희.
진희는 회의실 창가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열심히 달려야 한다는 압박, 육아휴직에서 돌아온 동료에 대한 뒷말,
그리고 집에서의 싸늘한 침묵이 한꺼번에 가슴을 짓눌렀다.
‘나는 왜 아직... 엄마가 되지 못한 걸까.’
서로 다른 공간에 있던 두 여자의 속마음이, 보이지 않는 어떤 선으로 맞닿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별님이의 선택은 이미 그들의 삶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