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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 태어난 아이

1화

by 이지아

새벽 공기가 차갑게 스며들었다.

강위로 얇은 안개가 눌러앉아, 세상의 색을 반쯤 지워놓고 있었다.


아침운동중인 진희는 강변을 따라 달렸다.


그때 골목 모퉁이.

허리를 굽힌 노파가 커다란 화분을 끌고 가고 있었다.
흙냄새와 함께 보라빛 수국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이고 무거워라...”
"제가 들어드릴게요."

진희가 달려가 화분을 번쩍 안아 올렸다.
노파도 숨을 고르며 웃었다.


" 고마워요 새댁. 고마워서 어쩌나... "

" 아니예요. 금방하는데요 뭘..."


노파의 눈이 진희를 잠시 훑었다.

희미하게 주름진 눈빛이 이상하게 깊어, 오래된 강물처럼 끝을 알 수 없었다.

순간, 진희는 이유 모를 서늘함을 느꼈다.

마치 자기 안쪽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 내가 화원을 하고 있어요, 저 큰길 사거리에 '별빛화원'이라고...

지나갈때 언제든지 들러요.”


노파는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그 손끝이 닿자,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묘한 온기가 전해졌다.

"네... 그럴게요..."
진희는 명함을 받아들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가 자리를 떠나자, 노파는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허허, 참 단단한 심장을 가졌구나... 이제 곧, 만날 아이가 있겠지..."


노파의 발밑의 수국이 바람도없이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진희는 애써 묘한 느낌을 떨치려는 듯

다시 러닝에 집중했다.

그리고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려는 그순간.


'응애… 응애…'


짧고도 날선 아기 울음이 공기를 갈랐다.

진희의 발걸음이 공중에 걸린 듯 멈췄다.



낡은 담장 위에 걸터 앉은 삼신의 눈길이

강변을 달리던 여자를 스치더니, 이내 공중화장실 문앞에서 멈췄다.

바람사이로 스며드는 짧고 여린 아기의 울음소리에 그의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가, 너의 울음은 길지가 않구나...’


어느새 화장실 앞.

진희와 교복차림의 소녀, 현주가 마주했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삼신을 알아차리진 못했다.


진희는 화장실 문 앞에서 멈췄다.

" 안에 누구 있어요? "
대답은 없었다. 대신, 기척이 끊긴 정적이 불안하게 스며들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문 안쪽에 맺힌 거친숨만이 밖으로 세어 나오고 있었다.

잠금쇠 너머에서, 누군가 생의 문턱을 붙잡고 있었다.


잠금쇠가 안쪽에서 걸린채 힘겹게 버티던 현주는

손바닥에 땀이 차오르는 걸 느끼며 손잡이를 비틀었다.


옆 칸에서 나온 여학생이 조심스레 말했다.
" 아줌마... 여기... 피..."

진희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지금 아니면 늦는다’는 본능이 외쳤다.


" 괜찮으세요?"

" 괜찮아요. 여기 저말고 아무도 없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문 좀 열어보세요 "


잠금쇠가 느슨하게 풀렸다.

문이 열리자, 교복을 입은 소녀가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


바닥은 축축했고, 붉은 선이 물 위에 번지고 있었다.


"아…"


탈진한 소녀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공포와 체념이 뒤섞인 얼굴은 불에 덴듯 붉게 달아올랐고,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어 흘러내렸다.

터져 부은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새어 나왔고, 온몸이 땀과 피에 젖어 작은 경련처럼 떨렸다.


소녀에게서 짧은 호흡이 연이어 터졌다.

꾹 참고 있던 숨만이, 그녀가 세상을 붙들고 있는 마지막 끝 같았다.


현주는 아기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금세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눈빛은 절망처럼 흐려졌지만, 팔은 본능처럼 더 조여 왔다.

놓고 싶으면서도 놓을 수 없는, 두 감정이 동시에 스쳐갔다.


진희는 급히 휴대폰을 꺼냈다.

"119죠? 여기 천국빌딩 1층 화장실이에요. 아기가 있어요, 빨리 와주세요!"


현주는 본능적으로 아기를 끌어안았다.

진희는 급히 겉옷을 벗어 떨고있는 소녀의 어깨 위에 조심스레 덮어주었다.

그 눈빛엔 '괜찮다'는 말을 대신하려는 듯한 간절함이 어렸다.

그리고는 망설임 끝에, 소녀가 더 움츠러들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곁으로 다가가 안아주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스스로에게 한 말이었는지, 아기에게 한 말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기는 가볍고도 무겁게, 현주의 팔 안에 얹혀 있었다.

그 작은 몸을 두 손으로 안았을때 아기는 울지 않았다.

미묘한 체온이 피부를 타고 전해졌다. 그 온기가, 오히려 두려웠다.

아직 살아있는 걸까, 아니면 ...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졌다.
삼신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소리를 들었다.
'짧은 명운을 타고왔구나. 잘가거라 아가'


구급대원이 아기를 안고 나왔다.
진희가 손을 뻗었다 멈췄다.
작은 손이 축 늘어져 있었다.


"심폐 시작합니다!"


구급대원의 외침이 퍼졌다.
하지만 현주의 시선은 아기의 얼굴에만 머물러 있었다.
마치, 숨이 붙어 있던 시간 전부를 알고 있다는 듯.


아침 해가 강 위에 번졌다.

진희는 주머니 속 명함을 꼭 쥔 채 서 있었다.


그날 밤, 뉴스 자막이 흘렀다.


‘오늘 오후, 시내 한 빌딩 화장실에서 태어난 아기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사망했습니다.’


화면은 빌딩 전경만 비췄다.

그럼에도 현주는 아기의 얼굴을 떠올렸다.


손끝이 저릿했다.
마치 아직도 그 체온이 남아 있는 듯.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온기를 놓아준 순간부터, 세상이 조금씩 달라진 것만 같았다.


그 시각, 강 건너 안개 속.
삼신은 낡은 담장 위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손바닥 위에 올려둔 별모양 씨앗이 희미하게 빛을 품었다.


그 빛을 감싸쥐며 낮게 읊조렸다.

"아가, 다음생에... 다른모습으로 만나자꾸나."


바람이 스치자 씨앗이 부드럽게 흔들리며,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순간, 낡은 벽돌담 너머로 바랜 낡은 간판 하나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별빛화원"


굳게 닫힌 문은 오래전부터 주인을 잃은 듯 적막했지만,

잠든 화분들 사이. 작은 씨앗 하나가 스스로 빛을 품기 시작했다.


*자전적 소설 <도라지꽃 시즌1 : 완결> 정주행하기


*자전적 소설 <도라지꽃 시즌2 : 완결> 정주행하기


*감성시집 <너를 부를 때마다 꽃이 핀다 >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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