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한 철, 피어나는 꽃처럼

아주 잠깐, 나도 누군가의 이름이 될 수 있었다.

by 이지아

여름 한 철 피어나는 꽃처럼, 나의 가장 반짝인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활짝 피었다.
그것도 아주 짧고, 조용하게,

아마 누구 눈에도 띄지 않았을 꽃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피었다.


공장 쉬는 시간,

나는 기타를 들고 언니들 앞에 섰다.


기타 줄 위에 얹힌 웃음 하나, 여름볕처럼 번졌다


언니들은 당대 최고 여가수인 이미자라고

나를 추켜세워줬다.


정말 나는 '이미자'가 된 것만 같았다.


' 이제 도라지도 안까도 되고,

글도 혼자 배워서 시도 쓰는 멋쟁이가 됐다 '


나는 내가 너무 기특해서.

꽉 껴안아주고 싶었다.


기타만 치면 숨 막힐 듯 가슴 벅차게 행복해졌다.


조장언니가 날 불렀다.


“명순아,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따라올래?”


조장언니가 툭 던졌다.


조장언니는 월급날이면

꼭 국수를 한 그릇 사주곤 하는 다정한 언니였다.


내가 친동생 같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인데, 언니 친동생은

폐병을 앓다가 어릴 때 죽었다고 했다.


지금은 엄마가 많이 아프셔서,

그 약값을 벌어야 한다고 했다.


가끔 조장언니를 바라보면,

눈은 항상 웃고 있었지만, 그 눈빛엔 내가 모르는 세계가 어렴풋하게 스쳐갔다.


언니는 늘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웃음은 조명이 아니라 스포트라이트 같았다.

내게만 밝았고, 바깥은 어두웠다.

무심한 말투 뒤에 뭔가 깊고 오래된 어른의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공장에서 제일 손이 빠르고 입 센 언니였다.

그런 언니가 내 사정을 제일 잘 알아줬고,

날 예뻐해 주니 그리 든든할 수가 없었다.


언니가 말을 하면

다 맞는 말처럼 들렸고, 멋있어 보였다.


나는 그런 언니가 가끔 말을 붙여주면 괜히 뿌듯했다.


게다가 내가 기타 치는 걸 제일 좋아해 줬다.


“ 어디 가는데요? ”


“ 나이트. 밴드 애들 리허설. 내가 잠깐 노래 부르거든. ”


“ 나이트요? ”


“응. 너 기타 치는 거 가서 한번 보여줘 봐.”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진짜 무대 조명 아래 기타를 들었다.


조명이 번쩍 켜지는 순간,
색색의 불빛이 연기 위로 퍼지며 내 눈앞을 흐렸다.


담배 연기 사이로 비치는 노란 조명,
그 속에서 무대는 낯설고도 매혹적인 냄새로 가득했다.


베이스 스피커에서 느껴지는 낮은 진동이 바닥을 울리고,
눈앞을 스치는 시선들엔 내가 아직 모르는 말이 실려 있었다.


세션 형들은 반쯤 피곤해 보였고,
나머지는 담배 피우며 스네어 드럼을 치고 있었다.


“ 형! 내가 말한 명순이.”
조장언니가 말했다.


조장언니는 오빠라고 부름 직한 사람에게

형이라고 불렀다.

어색했지만, 으레 그러려니 했다.


형이라는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어이, 꼬맹이. A코드 잡을 줄 알아?”


“네...”


낯선 코드, 낯선 무대. 그런데 손가락은 마치 알고 있다는 듯 움직였다


형들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 좋네, 이 꼬맹이.”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기타로 사람들 사이에 섞인 느낌을 받았다.


혼자가 아니라,
무대라는 낯선 곳에서
내가 뭔가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후로,
조장언니는 퇴근 후에 나를 데리고
연습실에 몇 번 더 데려갔다.


나는 이론도 몰랐지만
‘귀로 따라 치는 법’을 빠르게 익혀갔다.


며칠 후, 형 하나가 말했다.


“야, 얘 손끝이 똑똑하다."


"이거 귀로 주워듣는 거 쉬운 거 아냐.”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무대라는 건 꼭 방송국만이 아니란 걸.

언니가 보여준 길 어딘가엔 음악 말고도 다른 것이 숨어 있다는 걸


공장에서는 여전히

“명순아, 다림질 남았다”는 소리가 먼저였지만,


내 속에서는
다른 리듬이 움직이고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이제 귀로 세상을 듣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두 번 조장 언니를 따라 밴드연습에 나가곤 했지만,

공장일은 그리 녹녹지 않았다.


매일 야근에, 철야에

집에 갔다가 출근하면 잠잘 시간도 부족해

공장 한편에서 쪽잠을 자는 일이 부지기 수였다.


" 내일까지 컨테이너에 싣어야 할 상품만 해도 30톤이야 "

" 오줌도 싸지 말고 미싱 돌려! "

" 내일까지 기일 못 맞추면 니들 봉급에서 다 깔 줄 알아! "


반장님은 하루 종일 공장을 돌아다니며,

귓청이 떨어도록 싸납게 고함을 치고 다녔다.


졸리지 않으려 허벅지를 바늘로 찌르기도 하고,

잠 안 오는 사탕을 먹는 언니들도 있었다.


옆반의 미자언니는 어제 피를 토하더니,

오늘 공장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도 미자언니 안부는 묻지 않고,

그저 미싱만 연신 돌려댔다.


바늘도, 사탕도 소용없었다.

연신 몰려오는 졸음 앞엔,

누구도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어느새 고개가 푹 꺼지고,

정신을 놓은 손끝이 미싱에 끼이는 언니들도 적지 않았다


다들 그렇게 미싱을 돌리고 돌리고 또 돌렸다.


어느 순간 나는 미싱 바늘 아래에서 하루가 아닌 나를 재봉질하고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냈을까.

공장에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장 안에 처음으로 웃음이 번졌다

회사에서는 여공 노래자랑 대회를 연다고 했다.


1등 하면 금성밥통 준단다!

모두들 환호했고,

다들 대회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 나는 뭐 자신 있었다! '


대회날, 나는 통기타 하나를 메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봉급 뺏는 엄마도 잊었고,

집에서 나만 기다리는 쌍둥이들도 잊고 무대를 즐겼다.


언니들은 연신 내 이름을 불렀댔다.


" 청량리 이미자! " " 멋있다! "


맨 앞에 서있던 조장언니가

엄지손을 치켜세워주며 박수를 보냈다.


수많은 사람들 앞, 그 무대 위에서의 뭔지 모를 그 느낌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르리라.


그 무대는, 작은 꽃이 햇살을 처음 마주한 순간처럼 나를 열게 했다


노래자랑 대회가 끝나고,

온몸이 짜릿해지는 그 희열과 함께, 1등은 내 차지가 되었다.


언니들은 하나같이, 내 재주가 좋다고 입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 우리 명순이, 이제 진짜 가수네 가수! "

" 1등 먹으면 가수지 뭐야! "


사실 그때 나는,

노래자랑 1등 한 것보다 금성밥통을 받은 것이 하늘을 날 듯 기뻤다.


빨간 별표 하나면 엄마도 웃을 줄 알았다.

' 이제 밥 한다고 부 짓 간 불 앞에 동동거리고 안 서있어도 되겠다 '


나는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 차서,

엄마에게 자랑할 생각에 너무 어깨가 들썩들썩거렸다.


그때 나는 이 재주가, 나에게 어떤 인생을 펼쳐다 줄지 꿈에도 몰랐다.




그날 나는, 달력 하나를 부상으로 받았다.

달력 한 장을 벽에 붙여두고, 그날을 별표로 표시했다.


“여름 꽃 핀 날”
진짜로 그렇게 썼다.


퇴근길,
가슴속에서 노래 멜로디가 멈추질 않았다.
기타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시는 어떻게 그렇게 노래가 되었을까.
나는 세상을 향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등 상장과 함께,

부상을 들고 의기양양하고 돌아온 날.


쌍둥이들은 신기한 물건에 신이 나서 연신 만지작 거려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버지가 초콜릿을 가져온 날처럼 마음이 뻐근해졌다.


그날, 엄마는

발그레한 내 얼굴도 봐주지 않고,


그저,

내가 메고 있던 기타만 보였던 모양이다.


“ 쓸데없는 짓. 넌 뭐, 딴따라 될래? ”


" 쌀도 안 나오는 그런 짓을 뭐 하려 해 "


사실 난 뭐,

엄마가 쏟아내는 악담들처럼,

뭐가 되고 싶은 그런 생각조차도 없었다.


허리 한번 못 피고,

하루 종일 돌아가는 미싱을 잡으면서도,


아주 잠깐.

그저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는 게 행복했다.


타박만 하는 엄마에게

괜스레 심술이 나서

"그럼 딴따라나 돼 볼까?"라고 으름장을 놔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내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독이든 씨앗을 자꾸만 퍼부었다.


" 계집애가 설쳐대면 집구석 망한다 "

" 계집애가 자꾸 남에 입에 오르내리면 혼삿길 막혀 "


그 단어는 마치 내 삶에 던져진 저주 같았다.


엄마는 혹시라도 내가 활짝 피어날까 봐,

농약 같은 모진 말을 퍼부어댔지만,

나는 몰래 문틈을 보고 싶었다.

엄마가 혹시 나도 모르게 밥통을 바라보거나, 콧노래라도 흥얼거릴까 봐.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내 안에서 무언가가 피었다.


한가득 햇살이 내리쬐는,

내 삶에서, 아마 다시는 오지 않을
그 보랏빛 한 철.


그날 밤, 달력에 별표를 하나 더 그렸다

그 꽃은, 아무도 모르게 피고, 오래도록 향기를 남겼다.


그리고 나는 몰랐다.
꽃이 가장 만발했을 때가,
뿌리째 뽑히기 가장 쉬운 때라는 걸.


향기는 바람에 흩어졌지만,

나는 안다.

그날 나도 피었다는 걸


그날의 공기, 그날의 빛, 그리고 그 순간의 나를.

아무도 몰랐어도,
분명히 피어 있었던 한 사람.


―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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