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으로 울린 소리가 나를 깨웠다.
시집을 읽다 보면,
이상하게도 멜로디가 떠올랐다.
“이런 시는 멜로디가 딱 붙을 것 같아. 기타만 있었으면,,,”
말끝을 흐린 날, 내 눈엔 오빠 방구석에 먼지 쌓인 기타가 밟혔다.
오빠는 늘 엄마 몰래 담배를 피우고,
기타를 뚱땅거리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소리는 마치, 우리 집엔 없는 ‘자유’의 소리 같았다.
엄마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오빠가 한 번씩 통기타를 치기 시작하면,
그 기타 소리가 온 집 안을 맴돌면서,
왠지 모르게 마음이 말랑해졌달까.
하지만 엄마는 늘 잔소리였다.
“기타 같은 소리 말고, 공부나 해!”
엄마의 성화에, 오빠는 점점 기타를 손에서 놓게 됐다.
엄마는 늘 말했다.
“네 오빠는 공부만 하면 돼. 집안 기대가 다 저기 걸려있어.”
엄마는 그렇게 말해놓고도, 내가 방에서 흥얼거리는 멜로디를 문틈 사이로 엿듣곤 했다.
어느 날은, 설거지를 하며 내가 적어둔 가사를 낮게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게 그 노래냐? 뭔 소린지는 모르겠는데... 좀 들을만하더라."
잔소리는 여전했지만, 가끔 그런 순간마다 나는 알았다.
엄마도, 알고 있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그리고 어쩌면,
엄마도 내 마음을 안아줄지 모른다는 기대가 들었다.
그날 밤, 나는 살금살금 오빠 방 문을 열었다.
“불 꺼졌으니 자는 중이겠지? ”
기타를 품에 안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오늘은, 이 시로 해보자.”
손가락이 기타 줄을 따라 조심조심 움직였다.
노트에 적어둔 시 한 구절을 불러보니,
멜로디가 딱 붙었다.
그 순간, 가슴 한구석이 쨍하고 울렸다.
기타 줄을 누르던 손끝의 떨림,
도라지 껍질을 깎을 때처럼 집중하던 눈빛,
내 목소리를 따라 멜로디가 피어나는 그 순간이,
내가 가장 나다워지는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말로 하지 못한 것들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흘러나온다는 걸.
다음 날, 공장 쉬는 시간.
기타를 꺼내 노래 한 곡을 불렀다.
작업복 입은 언니들이 나를 둘러싸고 박수를 보냈다.
“야 명순아, 너 가수 해라.”
“니 노래 들으면 힘이 난다야.”
“이번에 동네 노래자랑 있대. 나가봐라!”
그날 저녁, 엄마는 평소보다 일찍 들어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 엄마... 나 내일 동네 노래자랑 나가도 돼? "
엄마는 반찬을 휘저으며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 네가 그딴 데 나갈 시간이 있냐? "
나는 아무 말 없이 식탁 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한참 뒤, 엄마가 덧붙였다.
" 네 오빠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 하지 마."
그 말이 가슴을 쿡 찔렀다.
오빠가 기타를 치던 모습, 그리고 지금의 내가 겹쳐졌다.
' 나는... 진짜 쓸모없는 걸까? '
시를 노래로 부르는 게, 그렇게 한심한 걸까.
하지만 그날 밤, 나는 기타를 꺼내 무릎 위에 올렸다.
그냥... 한 번만이라도, 내 마음대로 해보고 싶었다.
노래자랑 전날 밤이었다.
불 꺼진 방 안,
나는 오빠 기타를 가만히 무릎 위에 올려놨다.
기타를 껴안고 손끝으로 줄을 짚는 그 순간,
세상의 소음이 한 꺼풀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처음 한 음이 울려 퍼지면,
그 진동이 손바닥을 타고 팔을 지나 가슴속까지 스며들었다.
떨리던 심장이 줄의 떨림과 박자를 맞추며,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한 줄, 한 줄 짚어 내려가며
나는 마치 어둠 속을 더듬어 걷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또 정직하게 움직였다.
줄 하나 건드릴 때마다 공기가 달라졌다.
코끝엔 도라지 껍질 냄새가 가득했지만,
그 위로 미세하게 나무 냄새와 철심 냄새가 섞여
기타만의 오래된 온기를 풍겼다.
눈을 감고 한 음, 두 음 이어갈 때,
그건 노래가 아니라 내 심장이 흘리는 말 같았다.
가사를 붙여 부를 때면,
목구멍에서 떨리는 음 하나하나가
내 안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문장이었다.
말로는 도저히 못 풀어낸 것들이
노랫말과 멜로디 속에 걸려 나와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갔다.
마치,
속이 비어 허공을 떠도는 마음에
처음으로 무게를 실어주는 느낌.
아무것도 아니던 내가
그 순간만큼은
기타 줄 너머 세상과 연결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게, 너무 좋았다.
말 못 했던 시절까지도, 노래 안에서 말하게 해주는 그 순간이.
손가락이 떨렸다.
시를 부르는 게,
누군가 앞에서 내 마음을 펼쳐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심스레 멜로디를 짚는 순간,
'팅—'
갑자기 줄 하나가 끊어졌다.
심장이 철렁했다.
그때,
방 문이 삐걱 열리고 오빠가 조용히 들어왔다.
' 난 죽었다... '
오빠한테 혼날 걱정에 등줄기에 땀이 주룩 흘렀다.
오빠는 아무 말 없이 기타를 받아 들더니
책상 위에서 새 줄을 꺼내 묵묵히 갈아줬다.
줄을 다 끼운 오빠는 내게 기타를 내밀며 말했다.
“네가 치는 게 나보다 나은 것 같다.
망가뜨리지 마라. 진짜.”
그 말 한마디에,
이상하게도 손끝이 덜 떨렸다.
무대 바로 옆, 기타를 받아 들고도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손사래를 쳤다기보다, 그냥 몸이 굳어버린 거였다.
" 아냐, 나 못 해... 나 진짜 무서워."
그 순간 희자가 내 어깨를 툭 두드리며 말했다.
" 야, 명순아. 너 노래하는 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 알지? "
" 네가 안 하면 누가 하냐? 가자, 명순아. 그 자리, 니 거야 "
나는 희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한 번 숨을 들이쉬고,
무대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조명이 비치자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첫 음이 울리는 순간,
떨림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건 노래가 아니라, 내 마음이 흘러나오는 일이었다.
노트에 적은 시를 노래로 불렀고,
그건 마치 내가 나를 꺼내어 세상에 보여주는 순간 같았다.
기타 줄을 한번 튕기자,
조명이 눈앞에서 퍼지듯 피어올랐다.
관중석은 어둠 속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수많은 눈빛들이 지금, 나를 향하고 있다는 걸.
첫 소절을 부르려는데
가슴 안쪽이 뜨겁게 부풀었다.
" 하나, 둘..."
기타 줄을 누르던 손끝은 여전히 살짝 떨렸지만,
그 떨림마저 멜로디 속에 녹아들어
한 음, 한 음, 나만의 박자가 되어갔다.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울려 퍼졌다.
마치 내가 내 마음을 세상에 처음 내보이는 것 같았다.
그동안 말로 하지 못했던 속내,
아무도 물어주지 않았던 마음.
그 모든 것들이
노래 안에서 멜로디를 타고 살아 움직였다.
무대 한쪽에 서 있던 희자가
나를 향해 손가락으로 작은 하트를 그렸다.
그게 힘이 되어
나는 노랫말 하나하나를 꼭꼭 눌러 담아 불렀다.
두 번째 후렴구에 들어가자,
관중석 어딘가에서 박수가 터졌고
그 박수는 점점 더 커졌다.
어쩌면 그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노래 속 내 마음이 누군가의 가슴에 닿았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던 그 찰나—
그건 단순히 ‘기쁨’이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아찔하고 낯선 감정이었다.
무대 아래로 쏟아지는 시선들,
가슴 깊은 데서 뭉글거리던 감정이
멜로디에 실려 퍼져나갈 때
나는 알았다.
‘사람들 앞에 서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이런 나를, 사람들이 좋아해 준다.’
노래가 끝나자,
공기마저 멎은 듯한 순간이 있었고
곧이어 터진 박수는
내 몸 전체를 감싸듯 따뜻하게 번졌다.
그때였다.
관중석 어딘가에서
누군가 조용히 말했다.
" 예쁘다..."
속삭이듯 흘러나온 그 말.
이름도 아니고, 칭찬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가 가슴에 깊이 박혔다.
그 말은 마치
오랜 어둠을 지나 처음 마주한 빛줄기 같았다.
누군가 나를 ‘예쁘다’고 부르던 순간,
더는 숨지 않아도 되는 사람처럼.
처음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무대 위에서 ‘보이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박수보다, 상장보다,
그 단어 하나가
나를 자꾸 돌아보게 했다.
‘ 예. 쁘. 다. ’
그건 단지 겉모습이 아닌,
내 안에서 꺼낸 마음의 조각까지
누군가 봐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말이, 그날 밤 내 잠을 깨웠다
노래가 끝난 후, 누군가의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순간, 박수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게... 진짜였다.
정말로, 1등을 했다.
믿기지 않았지만, 무대 아래서 쏟아지는 박수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무대에서 내려오는 발끝에 아직 떨림이 남아 있었다.
조명이 닿지 않는 구석, 누군가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그 여자는 느릿하게 구두 굽을 바닥에 울렸다.
향수는 코를 지나 혀에 먼저 닿았고,
그 웃음은 짧았지만,
어딘가 깊고 오래된 이야기의 끝처럼 느껴졌다.
“노래 잘하네. 목소리에 끌림이 있어.”
그보다 내게 오래 남은 건,
무언가 나를 조용히 끌어당기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 오래 묻혀둘 얼굴이 아니네."
그건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낯선 세계가 손짓하는 문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날 이후, 내 별명이 생겼다.
" 노래 잘하는 명순이 "
" 기타 치는 시인 "
공장에서도, 동네에서도,
나는 이제 기타와 시로 사람들 마음을 어루만졌다.
노래자랑에서 상장을 들고 돌아오던 날,
엄마는 내 손에 들린 상장을 힐끗 봤다.
말은 없었지만,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상장을 들고 방으로 들어서자,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한 오빠는 나를 보며 한마디 툭 던졌다.
“야. 내 기타 망가뜨리면 진짜 죽는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 말엔 살짝 웃음이 섞여 있었다는 걸.
그리고 그날 밤, 오빠는 말없이 기타 줄을 새 걸로 갈아줬다.
그건 내 첫 번째 기타였다.
비록 목숨 담보 조건이 붙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오빠는 그 후로 한 번도 기타를 가져가지 않았다.
마치,
그 기타가
이제 내 것이라는 걸
조용히 인정해 주는 듯이.
그날 밤, 부엌 창틈으로 엄마 콧노래가 들렸다.
이상하게도, 내가 부르던 후렴구랑 꼭 닮아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부엌 쪽을 바라봤다.
엄마는 등 돌린 채, 국을 휘젓고 있었지만,
어깨가 살짝 들썩이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