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울음은 목구멍에서 멈췄다

우는 법도 잊은 여자아이

by 이지아


“야, 명순아. 또 시 적는 거야?”


희자가 내 노트 훔쳐보다가 킥킥 웃었다.

나는 후다닥 노트를 감췄다.


“보지 마! 아직 다 못 적었어.”


“시 적는 거야, 일기 적는 거야?”


“시야. 오늘 보생당 아재가 '사무치다'라는 말을 알려줬거든.”


“사무… 뭐?”


“사무치다. 마음 깊숙이 스며든다는 뜻 이래.”


“야, 네가 점점 시인이 돼간다, 야.”


희자는 놀리는 척하면서도, 언제나 내 글을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그걸 나는 눈치채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그 눈빛을 인정하면 괜히 울컥할 것 같아서.


나랑 동갑내기인 희자와는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랐다.


겨울철 세탁소 뒷길에 얼음이 얇게 낀 고무 대야를 엎어놓고 앉아선

‘편지 배달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고객님~ 편지 배달 왔습니다~”


“오메, 또 왔나! 여편네가 보내왔을까!”


희자는 늘 배달부였고,
나는 꼭 시골 할머니 흉내를 냈다.


서로 웃겨서 바닥에 데굴데굴 구를 때면
우리 치맛자락은 진흙에 물들었다.


비 오는 날엔 집집마다 처마 밑을 돌아다니며
처마 끝에서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을 손바닥으로 받아내며 놀았다.


시장 일을 돕느라 볕에 그을려 까무잡잡한 희자의 얼굴에는 늘 생기가 있었다.

희자는 나한테 지는 걸 싫어했다.


“누가 더 오래 견디나” 내기에서
희자는 손이 새빨갛게 얼어도 절대 먼저 손을 빼지 않았다.


결국 내가 져서 희자의 손을 잡고 연신 입김을 불어넣었다.


“넌 진짜 바보냐?”


장난기 가득한 초승달 눈을 한 희자는

“바보든 뭐든, 내가 이겼으니까 됐지~” 하며, 씩 웃어 보였다.


희자네 집은 동대문 시장에서 장사하는 부모님 덕에 늘 집이 비어 있었다.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았고,
우리 집 전깃불 나가면 나는 자연스럽게 희자네로 향했다.


가스불 위에 덥혀 있던 양은냄비 뚜껑을 열면
진한 멸치국물 냄새가 확 풍겨왔다.
그 냄새만 맡아도 속이 든든해졌다.


나는 희자의 방 한구석에 앉아 숙제하는 척하며 종이에 낙서를 했다.

연필심이 가느다랗게 부러지고 또 갈려나갈 때까지
나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희자도 굳이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괜찮냐고 묻지도, 무슨 일 있냐고 캐묻지도 않았다.


그 대신, 조용히 라디오를 틀었다.
작게 들려오는 노랫소리와
양은냄비 끓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가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곁을 지켜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 적는 걸 좋아했다.
며칠 못 다닌 학교였지만,

글을 배우는 시간만큼은 세상이 다 내 것인 듯 행복했다.


칠판 위 분필 가루가 날리던 그 순간,

글자가 내 손끝을 따라오던 기쁨은 아직도 생생하다.


학교를 그만둔 뒤에도 글은 나를 놓지 않았다.
글을 읽고 싶어 조갈이 났다.

특히 약령시장에서 엄마 일을 거들 때면 더욱 글자가 간절했다


엄마는 약재 봉투에 적힌 글자를 몰라 늘 애를 먹었다.


나는 그런 엄마 옆에서 조마조마하며, 어떻게든 글자를 읽어보려 애썼다.


황기인지, 당귀인지, 천궁인지... 글자만 알면 엄마 일이 훨씬 수월해질 텐데.


그런 생각이 들자,

그날부터 나는 연신 약방에 드나들며 약재이름을 죄다 외워버렸다.


" 명순아, 너 벌써 약재이름 다 읽을 줄 아니? "


" 네, 곰방 외웠어요 "


" 고놈, 참 똘똘하네, 그럼 엄마한테 이 약재 더 갖다 달라해라 "


" 네~ 아재! "


그날 이후로 '보생당 아재'는 주문표를 엄마에게 건네지 않았다.


주문표 담당이 된 나는 보생당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보생당에는 온갖 책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아재는 나에게 곧잘 책을 빌려주시곤 했다.


책을 읽은 다음날이면, 주문표를 핑계로 약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궁금한 거 투성이었던 나는


숨도 안 쉬고 아재에게 조잘조잘 궁금한걸 물었댔다.


" 아재, “저미다”가 뭐예요? "


" 흠... 그건 말이지. 마음이 살살 아프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한 기분이 드는 거야.

누군가를 너무 보고 싶을 때, 그런 거 있잖아. "


" 그럼, “찡하다”는요? "


" 찡한 건 잠깐인데 깊어. 눈물 나올 거 같은데 꾹 참고 있는 그런 순간. "


" 그럼 벅찬 건요? "


" 벅찬 건 감정이 배 안에 가득 차서 넘칠 것 같은 거지. 기쁜데 울고 싶은 그거. "


" 네가 글공부 시작해서 주문표 제대로 읽었을 때 그 기분일걸? "


아재말이 맞았다.


글자가 내 눈에 들어와,

처음으로 책 한 권을 오롯이 다 읽었을 때는,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올랐다.


마치 하루 종일 도라지를 손질해

햇빛 아래 나란히 줄 맞춰 말린 뒤,

보송보송하게 잘 마른 도라지의 하얀 속살을 만질 때

그 부드럽고도 단단한 감촉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설명할 수 없는 뻐근한 무언가가 차올랐다.




하루는,

희자가 내 생일선물이라며 시집 한 권을 내밀었다.

희자가 시집을 건네며 잠시 말없이 있다가


"그냥... 너한테 가는 게 맞을 것 같아서 "


도라지만 깎던 손으로, 조심스레 표지를 펼쳤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손끝에 남은 도라지 껍질 냄새에 눈시울이 아릿해졌다


처음엔 그냥,

희자가 준 거니까 한번 넘겨보자 싶었는데


한 장, 두 장,
그 글들이 내 눈을 타고 가슴까지 쑥 들어왔다.


이게 뭐라고,
아무것도 아닌 말들 같았는데,

내 마음을 훔쳐 들여다본 것 같았다.

모른 척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날도 도라지를 다 까고 나서,

나는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희자가 준 시집 옆에
낡은 연필 하나를 조심스럽게 놓았다.


처음 마음속에 떠오른 단어는 ‘그리움’이었다.
그 단어 아래에
어떻게든 문장을 붙이고 싶었다.


그리움은...


펜 끝이 종이를 스쳤다 멈췄다.
단어는 있었지만,
그걸 풀어낼 문장이 없었다.


그리움은 뭐라고 써야 하지?


' 그리움은... 따뜻하면서도 저린 거야. '


보생당 아재 목소리가 스쳤지만
그건 내 말이 아니었다.
나는 내 말로 쓰고 싶었다.


그리움은,
도라지 껍질을 한 줄 긁어낼 때마다
손끝에 남는 하얀 진물 같기도 하고,


밤늦게 불 꺼진 방 안에서
아무 소리 없이 울리는 속이 빈 종소리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걸
한 문장으로 쓸 수가 없었다.


연필을 들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침묵 속에서,
나는 종이 위에 천천히 써 내려갔다.


' 그리움은… 그냥, 오래 묵혀둔 말 같은 거. '


그 문장 아래,

나는 연필심을 눌러

작은 점 하나를 찍었다.


그건 말 못 할 이야기의 끝 같기도 하고,

아무도 모를 내 시작 같기도 했다.




그날 이후로, 도라지를 까다가도
시집 생각이 났다.
손가락에 진물이 맺혀도, 마음은 종이 위에 있었다.


“이런 말을, 나도 할 수 있을까?”


나는 시인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냥…


마음이 가득 차서 어디든 흘러나올 것 같은 이 기분을

적어두고 싶을 뿐이다.


도라지 냄새 밴 내 손으로라도,

내 마음을 쓰고 싶었다.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종이 한 장.
연필 하나.

그리고 그날 떠오른 단어 하나만 있으면,

나는 살 수 있을 것 같다.


희자는 알까?

그날 내게 건넨 시집이,

지금도 내 글 한 줄, 내 하루 하나를 붙들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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