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들키면 안 되는 것이라 믿었다.
“명순아. 너 요즘 왜 그래?”
조장언니가 재봉틀 바늘을 바꿔 끼며 한마디 툭 던졌다.
“요즘 많이 멍하더라.”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손만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바늘이 원단을 뚫는 소리 사이로,
슬픔이 밀려왔다.
첫 봉급을 그렇게 강탈 당한 뒤로,
나는 희망이 없어졌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만이 나를 가득 채웠다.
무기력한 어느날 밤,
쌍둥이들이 글씨를 따라 쓰는 걸 보며
나는 종이에 조용히 줄을 그었다.
" 기억, 니은, 디귿. "
" 쌍둥이들, 글자 공부 열심히 해 "
" 재미없어 누나, 이건 해서 뭐 해 "
" 너네 글 잘 쓰면, 시도 쓸 수 있어. "
내 말에 애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시는 뭐야? "
"시? 그냥, 마음으로 말하는 거."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오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마음으로 말한다는 말을
나는 얼마나 오래 잊고 있었을까.
공장일이 조금 여유가 생겨,
집에 식전에 들어올 때면
쌍둥이와 집안일은 온통 내 차지였다
"오빠 밥이나 차려라"
더 긴 잔소리 안 들은 게 어딘가 싶어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대학에 다니는 오빠는,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온몸에 메케한 냄새가 났다.
보글보글 된장찌개에 나물반찬 서너 개 올려
저녁 밥상에 올려 상을 들여놓으면,
" 네 오빠 밥상이 이게 뭐니? 어서 프라이라도 하나 부쳐와라 "
어김없이 엄마의 한 소리가 들려왔다.
후다닥 계란프라이를 부쳐 상에 올려놓으면,
이번에는 쌍둥이들이 배고프다고 아우성이었다.
" 누나, 배고파! 배고파! "
식구들 끼니를 챙기는 건 늘 내 몫이었다.
나도 허기가 지니, 부엌에 서서 찬밥에 김치 한 숟갈 막 뜨려던 참이었다.
" 명순아, 이거 내일까지 다 까야 된다! "
마치 내가 밥 먹으려는 걸 보고 있기라도 한 듯,
여지없이 엄마가 대문을 열고 도라지더미를 내려놓았다.
나는 그대로 숟가락을 내려놓고
빨간 대야로 덤벼들었다.
그게 밥을 빨리 먹는 가장 빠른 선택이었다.
도라지 대야에는 나랑 엄마만 앉아있었다.
집에 일손은 다섯인데,
여자 둘만 바삐 손을 놀렸다.
' 왜 나는, 밥보다 도라지를 먼저 받는 사람일까.'
처음으로 여자로 태어난 게 서러웠다.
하루는 공장에 기계를 고쳐야 된 돼서,
빨리 마치는 날이었다.
' 미뤄뒀던 기타 줄을 갈아야지 '
집에 도착하자마자
기타 줄부터 갈아 끼우니,
나도 모르게 꾹 눌러왔던 멜로디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 꽃은 핀다, 누구도 보지 못해도
나는 분명 피었다, 혼자서도."
그 노래가 끝났을 때,
문이 삐걱 열렸다.
엄마가 들어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말없이 나를 내려다봤다.
기타를 조용히 내려놓자, 엄마가 말했다.
" 계집애가 나부대면 재수 없다. 때려치워라 "
엄마에게 대들고 싶었지만,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 네 오빠 앞길 막지 마라 "
엄마는 아직도 오빠에게 모든 걸 걸고 있었다.
이해가 안 됐다.
내 봉급으로 우리 식구 풀칠하면서
어째, 허송세월만 하고 다니는 오빠한테
모든 걸 거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 엄마, 나 좀 봐줘 '
' 엄마 나도 허기져 '
마음속에 있는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그저 한쪽켠에 놓여있는
조그만 시집만 만지작 거렸다.
그리고 알았다.
지금 이 설렘은
들키는 순간
짓밟힐 거라는 걸.
그날 밤,
시집을 다시 꺼냈다.
노트에 마지막으로 시 한 줄을 더 썼다.
ㅡ 무화(無花) ㅡ
피고 싶었던 마음이
입 밖에 나오기 전 시들었다.
나는 활짝 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말하는 순간, 꺾일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번엔 조용히 피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으리라는 건
그땐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