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kyo, JAPAN
인생에 쉼표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쉴새 없이 달려오느라 몸과 마음이 지쳤고, 그러니 나에게 주는 보상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축적된 실패와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나라 자체에 트라우마Trauma 비슷한 것이 생겨 버린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결정한 것이 연이은 유학생활로, 이번에는 법학에서 벗어나 경영학을 전공하는 엠비에이MBA(주: 전문경영석사, Masters of Business Administration) 과정을 택했다. 국제중재와 함께 나의 또 다른 관심영역이었던 기업법무와도 연결고리가 있으니 썩 보기 괜찮은 쉼표라고 생각했다.
회복을 위한 쉼표와, 회피를 위한 쉼표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몰랐던 날의 선택이었다.
언플러그Unplug
미국의 작가 앤 러맛Anne Lamott은 얘기한다. “거의 모든 것은 잠시 전원을 끄면 다시 작동한다. 당신도 마찬가지다.Almost everything will work again if you unplug it for a few minutes, including you.”라고. 그러니 전원을 끄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완전히 껐다가는 영영 불이 다시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아 무서우니, 반만 꺼보기로 했다. 이력서에 빈 공간이 생기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던 그 시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타협이었다.
일본에 위치한 학교에 지원한 것에 거창한 뜻은 없었다. 집에서 가까웠고, 서구권에서 공부를 해보았으니 동양권에서도 유학생활을을 해보고 싶었고, 고등학교 이후로 손에서 놓았던 일본어를 배우고 싶었다. 이 역시 이유를 찾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사실은 쉬고 싶었고, 쉬기 위한 장소를 고르는 일에 가까웠으니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결국에 일본행이 결정된 것은 미국에서 지원한 학교들로부터는 불합격 통보를 받았기 때문으로, 사실상 나에게 선택권이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게 뉴욕에서 변호사시험을 끝낸 나는 도쿄로 이주하게 되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작정하고 실행한, ‘언플러그’였다.
작은 방, 큰 꿈
일본은 한국과 거리가 가까워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문화적 거리감이 크지 않아서 그런지 시카고에 갔던 때와 같이 모든게 새롭지는 않았다. 나리타成田 공항에 도착해서도 마음이 한없이 편안했던 기억이 있다. 아직 뉴욕에서 응시한 변호사시험의 결과 발표가 나기 전이었으나 어쨌든 열정적으로 매달렸던 하나의 과정에 마침표를 찍었고, 마음먹고 쉬기로 했으니 긴장도 풀려 있었다. 새로운 터전으로 나름 괜찮은 곳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변호사시험 준비를 하느라 집을 알아볼 시간이 없었던 나는 (일본에서 집을 구하는 절차는 정말 복잡하다.) 학교와 연계된 기숙사에 숙소를 구했는데, 해당 기숙사는 도심에서 떨어진 고즈넉한 동네에 위치해 있었다. 일본 영화를 보노라면 등장하곤 하는 작은 집들과, 그보다는 크지만 우리나라의 아파트보다는 현저히 낮은 맨션Mansion들, 개인 가게들과 편의점 그리고 대형 마트Mart 두어개가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학교와도, 도심과도 멀었지만 나는 이 동네를 꽤 좋아했다. 작은 동네가 가진 특유의 한적함이 있었고, 주변에 초등학교가 있어 항상 아이들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심 한 가운데 아파트를 얻었던 시카고에서와는 극과 극에 가까웠지만 나는 이 분위기도 상당히 좋았다.
변호사시험을 치르고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한 후 일본에 왔기 때문에 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시간이 촉박했다. 장소에 익숙해지는 일이라든가, 집기를 마련하는 일은 학교를 다니면서 차차 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생활했던 아파트에 비해 3분의 1 정도 될 듯한 기숙사 방을 사람 살 만한 상태로 만들어 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가을의 도쿄는 아름다웠고, 특히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노란빛깔의 은행나무가 장관을 이뤘다. 설렘보다는 여유와 편안함이 공존하는 마음으로, 나는 또 다시 신입생이 되었다.
그렇지만 사실은 마음이
쉬고자 했지만 사실 제대로 쉬지는 못할 거라는 걸 나는 마음 한 켠으로 분명히 알고 있었다. 첫째로는 전문석사과정이 그렇게 쉬울 리 없고, 둘째로는 내 성격상 주어진 공부를 게을리 하지 못할 뿐더러, 셋째로는 설령 시간이 남는다고 해도 – 만약 그렇다면 – 나는 또 다른 시험에 도전하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생각하면 쉰다는 것은 오히려 핑계였고, 나는 내가 갖춘 것을 꾸려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이대로 나아가면 다시는 무언가를 쌓을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고, 그리하여 사회로 나가는 일을 계속 유예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그렇고, 당시에는 당연하게도 이런 내 마음 상태를 잘 몰랐다. 정확히 무엇에서 기인한 공포심인지, 그로 인해 내가 어떤 선택을 내리고 말았는지, 또 그 결정이 내 인생을 어떻게 이끌어갈지에 대한 판단을 객관적으로 해내지 못했다. 감사하고 죄송한 부분은 그런 나를 재촉하지 않고 부모님이 나의 유학생활을 이때까지 지원해 주셨다는 사실이다. ‘이런 배부른 소리를 하는 나’를 질책하지 않고, 내가 헤매는 모습을 그저 안타까운 시선으로 지켜봐 주셨다.
아마 부모님은 이 시기를 지나면 내가 괜찮아질 것으로 생각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해 주셨을 것이다. 쉼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한 공감도, 지원도 부족함 없이 받은 셈이다. 그러나 이 시기가 오히려 나를 무너뜨릴 것이라고는, 부모님도 나도 생각하지 못했다.
키즈나絆
나의 일본 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피터Peter, 현재 나의 연인이다. 나는 당시 연애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나에게 집중하며 온전히 쉬는 시간을 갖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생은 역시나 – 이 부분에 있어서도 –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된 일이라든가 연인으로 발전하기까지의 과정을 ‘운명이었다’는 말로 미화하고 싶지는 않다. 연애의 시작이 무릇 그렇듯 적당한 계산과 적당한 적극성으로 맺어진 인연이었다. 그저 그 당시의 나에게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그에게도 내가 그러했으리라. 치열한 고민과 무수한 두드림 후에 우리는 연인으로 발전했다.
키즈나라는 말은 일본에서 끊기 어려운 정, 인연, 유대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마음이 힘든 시기에 만났고, 피터는 그 시기의 나에게 필요한, 제대로 된 위로를 주었다. 연애 기간 중에 팬데믹Pandemic이 있어 2년 간 만나지 못하는 일도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우리는 7년째 국제연애 중인 장수 커플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를 생각하면 내 안에는 이 단어가 꼭 생각나곤 한다. 만남의 과정이 운명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결국엔 끊기 어려운 유대를 가진 관계로 발전했고, 그 또한 운명만큼이나 낭만적이지 않나 싶다.
어느새 내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 그에게, 내 안의 그에 대한 애정은 매일이 지날수록 단단해 진다고, 그를 마음에 담게 된 것을 단 한 순간도 후회한 적 없노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 가끔 싸우고 미울 때는 분명 있지만 ‘너를 덜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니I never love you less’라고.
유보 留保된 불행
도피를 위한 쉼표의 가장 큰 맹점盲點은 고민과 불행을 미루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 올 문장은 정해져 있고, 종래에 그 문장에 도달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미루고 있던 고민들은 예고 없이 나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비즈니스스쿨Business School에 입학하고 1년이 지난, 즉 3학기 째가 시작된 시기였다. 학교 생활에 최선을 다하지도 못하고, 그와 동시에 시험 준비까지 하기엔 의지가 약했던 나는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 다시 마음이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학교 생활을 성실하게 한 것도 아니었고, 시험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다. 남은 게 없다고 여겼고, 그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나는 절망에 빠졌다. ‘끝이 없다’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된 것이다.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루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기억과 미련이 나를 끊임없이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기분이었다. 생각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과거를 돌이킬 수 없는 한 내 마음 속의 공허함은 메워지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이번에는 정신적인 붕괴에 가까웠다.
돌아갈 곳은 결국
한국에서 로스쿨을 다닐 때 나를 살려낸 것이 우리 아빠였다면(미국으로의 유학을 권유했던 것도, 바닥을 치는 자신감을 끊임없이 끌어올리려 해 주었던 것도, 그 외 말썽쟁이인 내가 일으키는 문제들을 발벗고 나서서 해결해 준 것은 모두 아빠였다.), 이때 내게 숨을 불어넣은 것은 우리 엄마였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결국 내가 숨어 들어간 곳은 부모님의 품이었다. 만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인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고, 나의 내밀한 역사를 모두 설명하고 나를 이해시킬 자신이 없기도 했다.
나와 매일 영상통화를 하며 딸의 안부를 챙기는 엄마에게 나는 마음껏 어리광을 부렸다. 괜찮은 척을 할 힘조차 없을 때였다. 부정적 사고의 굴레에 빠져 내가 이룬 꿈이 그리 소중하거나 대단해 보이지도 않았다. 너무나 간절했는데 이제 와서 그러했다. 일본에 오기로 한 선택이 잘못된 선택이었는가에 대한 회의가 일었다. 제대로 쉬지도 못했고, 무언가를 이룬 것도 아니었다. 허송세월을 보낸 기분이었고, 그 기분에 휩싸여 보내는 이 시간이 사실은 허송세월이라는 것도 몰랐다.
우리 엄마는 마음이 여리고 또 섬세한 분이시다. 자식들의 아픔을 본인의 것처럼 생각하시고, 어떤 생각의 결이든 잘 해석하고 읽어 내신다. 그때의 내 마음이나 상태는 나보다도 우리 엄마가 더 잘 알았다고 생각한다. 성과나 성취로 메워지지 않는 마음의 구멍도, 무언가를 이루었음에도 떨쳐지지 않는 열패감도.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학교 강의가 모두 온라인으로 전환되고, 나는 결국 일본에서의 생활을 계획했던 때까지 해내지 못하고 한국으로 일찍 들어왔다. 가족의 품에 있어야 한다는 부모님과 나의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2년가량의 회피는 회복을 통한 나아감이 되지 못한 채 실패로 막을 내렸다.
똑같은 상처를
“별 의미 없어.It doesn’t mean much.”
졸업을 축하한다고 얘기하는 연인에게 내가 한 말이었다. 의미가 있다고 해버리면, 불성실했던 나의 학교 생활을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에 발동한 자기방어기제였다. 학교에서 만났고 같은 학교를 졸업했는데 그 말이 얼마나 섭섭했을까. 그럼에도 연인은 “네 졸업이 나한테는 의미 있어. 축하해.”라고 얘기했었다.
변호사라는 목표를 이루었지만 근본적인 부분을 해결하지 않았기에 나는 나 자신에게 똑같은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해낸 일을 깎아 내리고,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을 후회하며 바닥을 치는 기분으로 매일을 지냈다. 그리고 그를 보면서 연인도 나와 함께 힘든 시기를 보냈다. 자신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줬으면 좋겠는데, 그게 너무 어렵다고 연인이 내게 말했었다. 그건 그의 탓이 아니었음을 지금의 그가 알기를 바라본다.
한 발짝 나아간다는 것
이 시기를 지나며 내가 얻은 깨달음은 반드시 회복되고서야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감으로써 자연스럽게 회복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엠비에이 과정이 끝나고 완전히 넉다운되어 한국에서 쉬는 시간을 가진 나는, 비로소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기로 했다.
쉽지는 않았다. 너무 공부를 오래 한 것이 패착敗着이었다. 이렇다 할 경력이 없으니 신입인데, 신입이라기에는 어쨌든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보다 나이가 많았다. 한국 로스쿨을 나왔으나 미국 변호사이고, 미국 변호사이나 미국에서 법학박사과정JD(주: Juris Doctor)을 밟지는 않았기에 포지셔닝Positioning도 애매했다. 이때도 대형로펌이며 엠비비MBB(주: McKinsey, Bain, BCG)라고 하는 빅3Big 3 컨설팅 펌Consulting Firm들에 면접을 보았는데, 줄줄이 불합격의 결과를 받아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서류를 통과했으니 내 경력이 문제였다기보다 그 경력에 자신이 없는 나의 태도가 면접에서 보였던 것이리라 생각한다.
지원하고 탈락하는 지난한 과정이 계속되었다. 연인이 있는 태국으로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던 건 한국에서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도 있었고, 나의 경우 외국에서 경력을 시작하는 게 유리하겠다는 판단 하에서 이기도 했다. 시선을 해외로 돌리니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방콕의 작은 로펌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회피에는 끝이 왔다. 현실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그 다음 문제였다.
여섯 번째 편지.
사랑하는 엄마께.
엄마가 좋아하지 않을 감정이란 걸 알면서도, 나는 엄마에게 늘 고맙고 미안해요. 아마 나는 평생 이 마음을 안고 살아가겠죠.
너무 가까워서 서로가 소중한 만큼 의도치 않게 상처도 주고받았는데, 사실 지금에 와서는 그 상처들이 잘 생각나지 않아요. 생각나는 건 어린 시절 잠들기 전 귓가에 들리던 자장가, 내 등을 다독이던 손길, 추운 날 목덜미에 목도리를 둘러주는 마음, 그런 것들이에요. 그래서 엄마는 나에게 따스함이에요.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훨씬 어린 나이에 나를 낳고 키워내며 모든 게 처음이었을 엄마에게 내가 힘이 되는 순간들이 있었을까? 내가 받은 상처는 기억나지 않아도, 내가 엄마를 힘들게 한 건 왜 이렇게 잘 기억이 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힘든 게 더 많았을 것 같은데 그런데도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예뻐하고, 걱정하고……. ‘엄마니까 괜찮다’고 하지만 사실 그런 건 없는데 말예요. 그걸 내가 더 일찍 깨닫지 못한 게 많이 죄송해요.
엄마 있잖아요, 나는 엄마가 나보다 행복하길 바라요. 나보다 훨씬 웃는 일이 많기를. 가슴에 풍요로움이 가득하기를. 세상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순간들이 계속되기를. 그러니까 나를 사랑하는 만큼 행복해져주기예요.
엄마의 영원한 단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