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꾸고, 이루고, 남겨두는 것

Manhattan, USA

by Julia P

한밤중에 도착한 뉴욕의 상공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여 비행기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까마득한 아래에는 커다란 직사각형의 어둠 주위로 (센트럴 파크Central Park이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맨해튼이 펼쳐졌다. 비행기가 착륙하며 점점 땅에 가까워지자 크라이슬러 빌딩Crysler Building의 꼭대기를 밝히는 빛이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자꾸만 비실비실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제이에프케이JFK(주: John F Kennedy) 공항에 내리자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뉴욕에 도착한 순간에도 내가 오래된 꿈의 장소에 와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좋은 의미로 기분이 들뜨고, 설렘에 손끝이 찌릿했다. 공항에서 맨해튼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강 건너로 도시의 전경이 보이는데, 언제나와 같이 번쩍거리는 그 광경이 마치 내 꿈이 이루어진 것을 축하해 주는 듯했다. 운전사와 실컷 수다를 떨고는 조용해진 틈에 차창에 고개를 살며시 기대었다.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드디어 이 곳에 왔다, 뉴욕. 꿈의 도시에.


꿈이 이루어지다


뉴욕은 오랜 시간 내 마음의 고향이자 내 꿈의 목적지였다. 아마 그곳에 있었던 순간들 중 행복하지 않았던 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꿈을 이루어 준 장소이기도 하기 때문에, 종래에는 그 도시 자체가 나의 꿈이 된 것 같기도 했다. 타임스퀘어Times Square에 들어서면 나는 언제고 뉴욕에 처음 발을 내딛던 그 날로 돌아갔다. 맑은 하늘 아래의 센트럴파크를, 밤을 잊은 채 휘황찬란한 빛을 내는 고층빌딩들을, 운치 있는 골목골목을 나는 진심을 다해 사랑했다.


뉴욕주 변호사로서 미국 현지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으나 기회는 많지 않았고 현실적인 벽 또한 높았다. 일단 로터리Lottery 형식의 비자Visa 추첨제가 큰 장벽이었다. 내 비자를 지원해 주겠다는 회사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불확실한 채용에 돈과 시간을 들이기에 냉정한 시선에서 나는 대체 가능한 자원이었다. 영어를 곧잘 하지만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고, 이렇다 할 경력을 제대로 쌓기도 전이었기 때문에 전문성이랄 것도 미흡했다. 그런 내가 직장을 얻어 뉴욕에 정착하기까지 정말 많은 운이 작용했다.


이때 나는 이민법을 전문으로 하는 작은 법률사무소에 채용되었는데, 지금껏 해 본 적 없는 분야의 법무였으나 그럼에도 전문분야에 대한 고려보다는 미국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적어도 태국에 있을 때와는 달리 이 일은 ‘법무’이기는 했고,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에서 일을 하는 것이므로 기존의 경험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리라 위안을 삼았다. 이미 한국에서 사내 변호사로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했으나 뉴욕에 산다는 건 직무에서 오는 만족감 이상의 효용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누군가 보기에는 상당히 무모할 결정을 내린 나는 직장인으로서는 처음인 미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뉴욕에서의 시간은 좋은 만큼 힘든 때가 많았다. 확실한 것은 꿈꾼 바와는 확연히 달랐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반대로, 힘든 시간이 많은 만큼 좋은 일도 많았다. 나는 뉴욕에서 유학 중인 동생과 같이 살았는데,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학교가 끝난 동생과 만나 집 주변의 펍Pub에 들어가 맥주 한 잔을 같이 하는 것이 일상의 낙이었다. 아침이면 센트럴파크에 조깅Jogging을 나갔고, 그러다 길거리 공연을 하는 악단樂團의 음악을 들으며 공원의 정취를 즐기곤 했다. 그런 소소하지만 결코 당연하지 않은 행복들이 있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을 지나는 출근길조차 가슴이 충만해졌다.


예술을 좋아하는 내게 뉴욕은 마음이 벅차는 도시였다. 주말이면 브로드웨이Broadway에 뮤지컬을 보러, 또 모마MOMA(주: The Museum of Modern Art), 메트로폴리탄MET(주: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등 미술관에 그림을 보러 나갔다. 몇 분만 걸으면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삶은 풍요롭고 즐거웠다.


힘든 일은 아무래도 회사와 관련이 있었다. 전혀 익숙하지 않은 분야의 업무를 하려니 적응에 시간이 꽤 걸렸다. 그리고 실무로 나온 후 처음으로, 회사에서 업무 외 ‘사람’과 맞지 않아 겪는 어려움을 경험했다. 지금도 그리고 당시에도 알고 있었지만 이는 누구나가 언젠가는 겪는 일로, 나의 경우 운이 좋아 사회생활을 하고 상당히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와 같은 고난에 맞닥뜨린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상대에 대한 미움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컸다. 상대로 하여금 나를 만족스럽게 여기도록 해내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실망감이었다. 도돌이표처럼 그런 생각으로 돌아가고 있는 나 자신에 위화감이 들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를지언정 언젠가 내가 분명 느껴본 적 있는 듯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곧, 내가 다시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회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기심을 내려놓기


나는 내가 힘든 원인을 외부가 아닌 스스로의 내부에서 찾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이것이 이기적인 사람의 특징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타인으로 하여금 내 삶에 끼어들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의 사람은 마음이 병들기가 쉽다고도 했다. 사실 자신의 통제 하에 있지 않은 일도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고민할 것도 없이 과거의 내가 이미 거쳐 온 과정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판단이 비교적 빨랐다.


회사 생활은 갈수록 힘들어졌다. 위축되니 일에 실수가 늘었다. 그러니 더욱 위축되는 결과의 악순환이었다. 나와 맞지 않는 방식의 소통은 자신감을 더욱 잃게 만들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일을 하는 것이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뉴욕에 있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일단은 나 자신을 지켜야 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사정이 있고, 어떤 행동 뒤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땅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내가 당시 겪었던 사람에게도 충분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게다가 어쨌든 나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미국으로 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고마움은 지금도 부정할 수 없다. 가보지 않았다면 끝까지 미련으로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 견디기엔 다른 모든 상황이 괜찮지 않았다. 결국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고, 다시 취업시장에 뛰어 들었다.


배움의 시간


이직은 녹록지 않았다. 이유야 찾으려면 많았다. 전부 나 스스로 납득 가능한 이유들이었다. 미국에서 제이디JD(주: Juris Doctor, 법학박사) 학위를 가진 변호사가 아니고, 미국에 체류하기 위해서는 고용주의 재정적 그리고 법적 지원이 필요한 신분이었다. 그리고 이 외에도 내가 알고 또 알지 못하는 많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곧바로 포기가 되지 않았다. 어렵게 이룬 꿈을 조금 더 누리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뉴욕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였고, 결국 나는 한국에도 지원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훨씬 많은 기회들이 주어졌고, 그 중에는 내가 하고자 하는 업무를 제안하는 곳들도 있었다.


2개월 쯤 뉴욕에서 이직을 준비하고는 이곳에서 내가 원하는 직업적 성취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인정하고 나니 그 단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야 했다. 직업적 성취를 타협하여 뉴욕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뉴욕을 떠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인지. 그리고 나는 나의 오랜 꿈을 그곳에 남겨두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합리화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선택이 꿈을 포기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꿈은 하나가 아니고, 나는 직업적 성취라는 꿈을 내 인생의 다음 단계로 선택한 것 뿐이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큰 아쉬움은 없었다. 해볼 만큼 해보았다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포기하기에 짧은 기간이라 여길 수 있지만, 내게는 과장 보태어 억겁億劫의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직장을 관두고 난 후였으니 마음이 초조하기도 했고, 미국에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기한에 끝이 다가오고 있기도 했다. 여러 상황들이 나로 하여금 한국으로 돌아갈 유인이 되어 주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관심이 가는 회사로부터 면접 제의가 왔다. 채용 절차를 진행하려고 하니, 업무능력에 대한 시험을 치러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하여 원격으로는 진행할 수 없었다. 나는 뉴욕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아주 짧은 체류를 마치고 내가 오래도록 꿈꿔왔던 도시를 떠났다. 나로 하여금 꿈을 꾸게 했던, 또 그 꿈을 이루어 주었던 곳에 언젠가 나를 살아가게 했던 바람을 남겨두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삶의 다음 단계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는, 또 지금은


What is meant for you will not pass you and what has passed you was not meant for you.

당신을 위해 정해진 것은 결코 당신을 지나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을 지나친 것은 원래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출처가 조금 뜬금 없는데, 이는 내 핸드폰 케이스를 장식하고 있는 글귀이다. 인생에서 떠나 보낸 것들을 아쉬워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고른 케이스인데, 의도치 않게 오랜 시간 내 마음에 위안이 되어 주고 있는 문구가 되었다.


뉴욕에서의 생활을 정리하면서 이곳에 처음 도착했던 날의 부풀었던 마음을 떠올렸다. 그러다 곧 깨닫는다. 그때는 나의 것이었고, 지금은 아닌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평생이 걸려도 주어지지 않을 기회이고 삶이었을 터이다. 꿈을 꾼다고 해서 모두가 그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적어도 나의 경우 나를 괴롭게 했던 마음의 본질은 욕심과 미련이었다. 욕심의 마음을 태국에서의 깨달음을 통해 극복했다면, 뉴욕에서의 생활을 기점으로 나는 미련의 감정을 극복해 보는 경험을 했다. 극복의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 일부분의 충족과 일부분의 인정을 통한 극복이었다. 충족해 보았으니, 이제 되었다. 할 만큼 해 보았으니, 이제 놓아주자.


지금까지 애썼다. 잘 해 왔어. 그게 참 대견하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먼 길을 돌아


언제나 해외에 있다가 한국에 돌아와 인천공항의 바닥을 밟으면 가슴이 한없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인천공항에 내려서 마음 깊은 곳이 이완되는 듯한 평온함을 느꼈다. 비로소 ‘집’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온전히 한국을 보금자리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나도 모르는 새 트라우마가 극복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치유하지는 않지만, 무엇이든 치유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음 속에는 단언컨대 한 톨의 후회도 남아있지 않았다. 완전하게 비워낸 마음에 이제는 행복을 가득 채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야 한국에 ‘돌아왔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물론 제대로 알고 있었다.


Home is where the heart is.

집이란 마음이 머무는 곳이다.


마음이 머무는 곳. 사랑이 있는 곳. 나는 이곳에서 사랑하고 사랑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의 고향을 비로소 사랑해 마지않게 되었다.






여덟 번째 편지.



나는 너의 진심을, 너의 고난을, 너의 눈물을 알아. 나만은, 네가 견뎌 온 역경의 시간들을 오롯이 알아.


네가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모습도, 조금은 멋없다고 생각하는 모습도. 그건 전부 네가 살아온 날들의 정직한 흔적이고 그 흔적이 지금의 너를 만들었으니까, 현재의 너를 사랑하는 만큼 나는 네게 남은 그 모든 흔적들을 사랑해. 그건 모두 사랑받아 마땅한 시간들이야.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아리고, 한없이 애틋한 마음이 되는 그런 삶의 조각들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감정을 잊지 않은 너는 꽤 멋진 사람이지 않니? 상처받고, 주저앉고, 괴로워져도 눈물을 닦고 일어서서 다시 사랑해 보이는 너는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지 않니. 조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생각해.


그러니 부디, 네가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마.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사랑하기를 멈추지 마.


너를 가장 사랑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