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wind)과 바람(hope)의 장소

Chicago, USA

by Julia P

오헤어O’Hare 공항에 내리자 너덜너덜 지쳐 있던 몸과 마음에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의 도시 시카고Chicago, 그 곳에 나는 많은 바람을 이고 갔다. 과거를 청산하고 싶었고,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었고, 실패를 보전할 성공을 거두고 싶었다. 인생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정도의 경험치는 쌓였지만 그럼에도 특별히 인생에 두 번째 기회가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번만은 내 마음대로 흘러가게 해보자고, 이번에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포부와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그렇게 미국에서의 두 번째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생을 리셋Reset할 수 있다면


인생에 무의미한 시간은 없다는 흔한 얘기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어서, 교환학생 시절의 실수들을 자양분으로 삼아 나는 시카고에 훨씬 수월하게 정착했다. 가구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전기는 어떻게 개통해야 하는지, 그 외 계좌, 휴대폰, 집기 등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모든 일이 훨씬 쉬웠다. 내가 지낼 아파트에 처음 들어서던 순간의 기분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넓은 통창 밖으로 펼쳐진 미시간Michigan 호湖와 네이비 피어Navy Pier. 토요일마다 이 곳에서 보게 될 불꽃놀이가 그 순간 눈앞에 선명히 그려졌다.


첫날은 도시를 탐방했다. 지도 앱App을 켜지 않고 무작정 걸었다. 시선에 닿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시카고에 방문하는 일이 처음도 아니건만 모든 게 새로워 보였고, 강가를 걷노라면 지나가는 비둘기에도 가슴이 설렜다. 학교도 미리 가보았는데, 미시간 호의 전경이 펼쳐진 도서관이 압권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빨리 공부를 하고 싶었다. 이곳에 앉아 법학을 공부하는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제법 멋졌다.


이때의 나는 인생을 리셋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으로 떠나오기 전 지도 교수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리셋하고 싶겠지만, 인생이 그렇게 되지는 않아.”라고…….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그러고 싶지 않은 순간이 오기도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두고 보시라고, 나는 해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었기에 반항심만 가득이었다. 그 어떤 지혜로운 말도 내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나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깨닫는다.


새로운 무언가의 시작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하기 전 학교에는 미국법 개괄에 대한 강의를 들을 수 있는 별도의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나는 당시 이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조금 일찍 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새로운 시작에 열정 만만이었던 나는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는 데도 적극적이었고 발표 중심 수업에도 거침없이 참여하였다. 모든 것이 즐거웠다. 다양한 국가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환상을 갖고 있던 ‘미국 로스쿨’이라는 환경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일도.


학교에서 사귄 가장 친한 친구들은 각각 멕시코, 독일, 프랑스에서 온 친구들이었는데, 성인이 되고서 다른 나라의 친구들과 이토록 긴밀한 관계를 가져본 것은 처음이라 그마저 즐겁고 새로웠다. 그들의 역사에 대해 배우고, 생각에 대해 알게 되고, 국경을 넘어서 공통된 주제로 토론하면서 우리는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시시껄렁한 얘기를 나누면서 가깝게 지냈다. 그들은 날이 서 있지 않았다. 물론 대부분이 각자의 국가에서 이미 법조인이라는 목표를 이루었고, 휴가 차 미국 로스쿨에 온 친구들이었기에 마음에 여유가 있어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유가 어찌 되었건 나는 그 사람들이 좋았다. 나의 가치를 공유해주고 인정해주는 그들이 많이 고마웠다.


구체적인 내용이야 다르지만 이미 법학을 공부한 나는 금세 미국 법학의 내용을 숙지해 나갔다. 새로운 지식도, 새로운 수업 방식도 모두 즐거웠다. 일방향적 강의가 주된 방식인 한국 로스쿨과 달리 미국 로스쿨은 소크라테스식 기법으로 수업을 하는데, 이는 교수와 학생, 학생과 학생이 서로 소통을 하는 수업 방식이다. 해당 방식은 사람의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고, 소위 콜드콜Cold Call이라고 하는, 교수가 학생을 지목하여 질문을 하는 방법은 많은 학생들이 두려워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이 신선하고 재밌었다. 교수님이 부르기도 전에 손을 들고 발표했다. 맞을 때도, 틀릴 때도 있었지만 틀려도 마냥 좋았다.


세계를 무대로


로스쿨에서 이루었던 가장 큰 성과, 혹은 가장 독특한 경험을 꼽으라면 비스 모의 국제상사중재 대회Willem C. Vis International Commercial Arbitration Moot에 학교 대표로 출전한 일이었다. 오랫동안 자존감이 깎여 있던 내게 대표로의 선발은 ‘내가 이 곳에서는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다. 결과적으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국제 무대에서 경쟁을 해보는 경험은 내게 큰 자양분이 되었다. 보다 큰 무대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꿈을 내게 심어 준 것이다. 이때의 경험으로 나는 국제중재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 분야의 전문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인생은 역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준비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외국인들과 같이 학교생활을 하는 일은 재미있었지만 함께 일을 하려니 문화적인 차이가 크게 작용했다. 대표팀에는 한국인인 나와 중국인 한 명, 미국인 두 명이 있었는데, 법을 해석하거나 적용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대화하는 방식이나 일하는 방식이 잘 맞지 않아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 경험으로 나는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은 사고 체계 자체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사이에서 의견을 조율하는 법을 배웠다. ‘타인의 시선’을 이해하는 일을 이때 비로소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움의 시작


다만 몸이 집에서 멀어져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놓치는 순간들이 있게 마련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할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와 꽤 각별한 사이였다. 유난히 나를 예뻐 하시던 할아버지는 대가족의 사진을 찍을 때도 나를 옆에 두실 정도로 나를 챙겨 주셨다. 아빠는 할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엄한 아버지셨다고 하시는데, 나에게는 오직 자애慈愛로운 모습만이 남아있다.


나의 조부모님은 제주도에 사셨고, 은퇴 후에는 귤 과수원을 하셨다. 그 과수원을 뛰어다니던 기억이, 그런 나를 맞아 주시던 할아버지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을 꼽으라면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학교에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었는데, 그를 알게 된 할아버지께서 나를 보러 공항에 나오셨다. 단체활동 중이라 시간을 그리 낼 수 있지 않았는데도,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 내 얼굴을 보러 오셨던 할아버지를, 그런 할아버지께서 공항 창문 옆에 서서 기다리고 계시던 것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할아버지는 내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시던 분이시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예뻐 하셨고, 나 자신조차 부끄러워하던 성취를 기쁘게 축하해 주셨다. 대학 입시 후 할아버지께서 주셨던 편지는 아직도 나의 책상 서랍에 고이 남아 있다. 그런 할아버지께서,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돌아가셨다.


사라짐에 대하여


소식을 듣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마음이 서러워졌다. 친구들의 얘기를 들으면 조부모님의 죽음은 직접적인 슬픔보다도 슬퍼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대한 슬픔이 크다는데, 나는 그저 내가 너무 슬펐다. 조부모님의 죽음을 처음 경험했던 나는 그 슬픔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 몰랐다. 멀쩡히 하루를 살아가는 것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애도하는 마음과, 내 삶을 사는 일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던 때였다.


하지 못한 말들이 생각났다. 꿈을 이루는 모습을 할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다는 게 서글펐다. 시간이 흐르면서 슬픔은 무뎌졌지만 그리움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이때 살면서 처음으로, 소중한 사람과 어떻게 해도 만날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을 경험했다. 누군가를 추억 속에 묻는다는 일이 얼마나 괴로운지, 슬픈지, 눈물이 나는지……. 그 모든 것을 처음으로 겪었다.


마지막으로 본 할아버지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았다.


이것이 나의 최선


1년의 시간은 금세 흘렀다. 어느덧 졸업을 하고, 변호사시험Bar Exam을 볼 시기가 다가왔다. 우리 학교의 대부분 학생들이 버팔로Buffalo에서 시험을 치른 데 반해 나의 경우 맨하탄Manhattan에 배정되어 그곳에서 시험을 보았다. 시간적 여유를 갖고 뉴욕New York에 도착해서 호텔Hotel 주변을 둘러보고, 시험장까지 걸어가 보았다. 뉴욕 방문도 네 번째였는데, 낯설지 않았음에도 그 순간의 뉴욕이 너무나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뉴욕이라는 도시에 애정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이때였던 것 같다.


떨리는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일어나서 씨리얼 바Cereal Bar 하나를 아침으로 먹고 시험장에 걸어가는 순간까지도 머릿속에 욱여 넣은 지식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시험장에 도착하여 소지품 검사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경비를 맡고 있던 남자가 내게 손바닥을 보이며 웃었다.


“Good luck! 행운을 빌어!”


그 순간 잔뜩 굳었던 몸에 따뜻하게 피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마법처럼 긴장이 풀렸다. 잠시 멈칫하던 나는 이윽고 상대의 얼굴을 마주보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그의 손바닥에 짝- 소리가 나도록 나의 손바닥을 맞대었다.


“Thank you! 고마워!”


씩씩하게 인사를 건네고 시험장에 들어섰다. 어쩔 수 없이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였지만, 한국에서와 같은 숨막히는 느낌은 없었다.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시험이 시작되었다. 뉴욕의 유수한 로스쿨 학생들과 같은 시험장에서 시험을 보는 것은 꽤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어쩐지 타자 치는 속도마저 그들보다 내가 현저히 느린 것 같았다. 그러나 믿어야 했다. 이것이 나의 최선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려 했다.


그리고 세 달 가량이 지난 어느 날, 메일Mail 한 통이 도착했다.


이 날을 위해 나는


메일을 열었다.


Dear Candidate:
지원자님께:
The New York State Board of Law Examiners congratulates you on passing the New York State bar examination held on July 24-25 2018. This letter also confirms that ———.
뉴욕주 법률심사위원회는 2018년 7월 24일과 25일에 시행된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 편지는 또한 ——라는 사실을 확인해 드립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등줄기를 타고 희열이 흐른다.


오랜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다섯 번째 편지.



보고싶은 할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이 아직까지도 후회로 남아요. 그때는 몰랐거든요. 다시는 할아버지를 만날 수 없을 거라는 걸.


할아버지께서 떠나셨다는 걸 들었을 때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요. 한 번 더 안아드릴 걸, 더 자주 찾아뵐 걸, 사랑한다고 한 번은 얘기해볼 걸. 명절 때 할아버지댁을 찾아뵙고 택시를 타고 떠나는 때면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봐 주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려요.


제가 제법 제 몫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거든요. 할아버지께서 제 작은 손에 귤을 쥐어주시던 시절과 달리 이제는 제가 맛있는 과일을 잔뜩 사들고 갈 수 있는데. 그런 기회가 영영 오지 않는다는게 많이 서글퍼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습니다. 보여드리고 싶은 모습도 많아요.


그보다는 그저, 많이 그립습니다.


언제나 그 날들을 그리는 손녀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