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의 곡선, 그리고 나의 슬럼프
더닝-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란,
경험과 지식이 부족할수록 자신의 능력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는 심리 현상을 말한다.
무언가를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
아주 작은 성취만으로도
'이제 좀 알겠어'라는 착각이 찾아온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지 서서히 깨닫게 되고,
자신감은 바닥까지 곤두박질친다.
그 절망의 구간을 지나
꾸준한 경험과 반복을 통해
자신감은 꺾이고, 실력이 쌓이며
비로소 조용한 확신이 생긴다.
이 곡선의 형태는,
전공의 수련 곡선과도 참 많이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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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성공하고 나서, 나는 내가 대단한 줄 알았다.
며칠 동안 몇 명의 환자를 무난히 넘기고 나자,
나도 모르게 '이제 좀 해낼 줄 아는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나 역시 그랬다.
1년 차 내과 전공의였던 나는,
언제부턴가 "이제 좀 할 줄 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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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신장내과 병동에서 한 환자를 맡았다.
기저질환으로 만성 신부전이 있던 70대 남성 환자였고,
폐렴이 악화되며 전신 패혈증 소견을 보이고 있었다.
혈압은 떨어지고, 체온은 39도를 넘었다.
나는 외워둔 알고리즘대로 움직였다.
'패혈증엔 수액부터.'
망설임 없이 수액을 넉넉히 달고,
항생제를 투여하고, 혈압상승제를 준비했다.
그런데 몇 시간 뒤, 환자는 급격히 호흡곤란을 호소했고,
흉부 X-ray에는 폐부종 소견이 나타났다.
다음 날 아침 회진에서 교수님께 혼이 났다.
“이 환자 신기능 고려도 안 하고 수액 이렇게 넣었어?”
“조기 투석은 왜 준비 안 했어? 그냥 수액 과다로 폐부종 온 거잖아.”
“왜 물어보지도 않고 니 멋대로 판단했냐?”
교수님의 말이 끝났을 때,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끝만 바라봤다.
그 순간의 침묵이, 가장 크게 나를 질책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줄 알았던 건, 그냥 착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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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 ‘우매함의 봉우리’에 서 있었다.
알고 있다는 착각이
가장 큰 실수를 만드는 시기.
가장 위험한 순간.
바로 이 봉우리에 올랐을 때, 가장 큰 실수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면,
‘절망의 계곡’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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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은
가장 부끄럽고,
또 가장 성장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동시에,
슬럼프에 빠져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어떤 약을 쓸지,
어떤 용량으로 처방할지,
사소한 결정조차 쉽게 내리지 못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처방을 놓고 다시 고민하곤 했다.
‘왜 이렇게 나만 멍청한 걸까.’
‘차라리 인턴 때가 더 편했다.’
내가 내리는 모든 판단이 두려웠고,
그 두려움이 손끝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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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계곡을 지나며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처방을 내리기 전,
'지금 이 판단이 맞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됐다.
진료란 단순히 프로토콜을 읊는 게 아니었다.
진짜 진료는,
과거력과 가족력, 복용 중인 약물, 검사 수치 하나하나까지
환자라는 전체 그림 속에서 조율하며 결정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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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깨달음의 오르막’을 오르고 있다.
아직 부족하지만,
예전처럼 자만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지금도, 스스로를 경계한다.
“지금이 가장 위험한 순간일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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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 곡선 위를 걷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