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설명하는 법
DNR(Do Not Resuscitate), 그것은 생의 끝에서 더 이상의 고통을 멈추겠다는 조용한 약속이다.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멈추고, 환자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도록 돕는 선택이다. 하지만 그 결정을 내리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매번 흔들린다. 그래서 DNR은 단지 의학적 서류가 아니라, 삶과 이별을 잇는 마지막 언어다.
처음 DNR 동의서를 받던 날이 떠오른다. 의국 책상 한쪽에는 'DNR 설명 인계장'이라는 문서가 놓여 있었다. 어떻게 말하면 보호자가 조금이나마 덜 힘들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어떤 표현은 피해야 하는지 조언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인계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날따라 낯선 책임감과 묵직한 두려움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동의서를 들고 병실 앞에 섰다. 문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병실 안은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인공호흡기의 '푸슉푸슉' 소리만이, 희미한 숨결처럼 병실 가득 퍼지고 있었다. 가족들은 말없이 환자의 손을 꼭 쥐고 있었고, 나는 수십 번 연습했던 문장을 조심스레 꺼냈다. 막상 보호자 앞에 서면 말끝이 자꾸 흔들렸다. 설명은 더듬거렸고, 보호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과 전공의는 하루에도 몇 번씩 DNR 동의서를 받는다. 익숙해지는 일이라고들 하지만, 그 서류를 내미는 순간은 여전히 조심스럽고 낯설다. 반복될수록 마치 기술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들 속에서, 감정이 무뎌지는 나 자신이 두렵다.
나는 이렇게 설명한다. “환자분은 여러 장기 기능이 심하게 저하된 상태입니다. 심정지가 오더라도 회복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심폐소생술은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목에는 관을 삽입해야 하며, 전기충격도 시행됩니다. 이후 뇌손상이나 출혈 같은 합병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 설명이 너무 차갑게 들릴까 두려우면서도, 매번 꺼내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말의 온도를 고민하지만, 결국 전달해야만 하는 진실이다.
설명이 끝나면 병실엔 무거운 고요가 감돈다. 가끔은 보호자가 입술을 깨물고, 가끔은 두 손을 모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쉰다. 다시 깨어날 수 없는 몸에 그 모든 고통을 견디게 해도 되는지, 그 질문은 결국 환자의 마지막을 어떻게 지켜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이 말을 수없이 반복하면서도, 마음이 다치지 않는 법은 아직도 모르겠다. 보호자가 말없이 병실 밖으로 나가던 뒷모습, 침대 옆에 앉아 환자의 손을 쓰다듬던 장면은 자주 마음속을 떠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말이 그 마음에 닿았을까. 그 선택이 정말 덜 아픈 길이었을까. 닿지 않았더라도, 그 순간 나는 진심이었다.
며칠 전, 중환자실에서 만난 한 중년 여성이 떠오른다. 아버지의 DNR 동의서를 앞에 두고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끝내 사인을 하고 말했다. "이 종이에 사인하면… 아빠가 정말 떠나실 것 같아서요."
환자들은 말한다. 백이면 백, 살 수만 있다면 끝까지 치료해달라고. 나라도 그럴 것이다. 가능성이 있다면, 누구나 놓지 않는다. 그래서 보호자의 선택은 더 고통스럽다. 이건 희망을 내려놓는 일처럼 느껴지니까. 마치 손을 놓는 순간에도 눈을 떼지 못하는 이별처럼.
특히 갑작스럽게 입원한 경우라면, 보호자는 이별을 준비할 시간조차 없다. 충격과 혼란, 죄책감 속에서 펜을 드는 보호자를 나는 수없이 봐왔다. 그럴 땐 말보다 침묵이 더 깊은 설명이 된다.
가끔은 DNR에 서명하고도 마지막 순간에 "다시 살려주세요"라는 요청이 온다. 그러면 우리는 숨쉬는 관을 다시 삽입하고, 혈압을 올리는 약(승압제)을 투여하며 가능한 모든 처치를 시작한다. 하지만 치료의 고통을 견디는 환자의 모습을 본 뒤, 보호자는 다시 말한다. "그만해주세요. 이제는 괜찮아요."
나는 그 말을 탓하지 않는다. 그 안엔 사랑과 후회, 그리고 놓아주는 결심이 동시에 담겨 있다. 그럴 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이제는 더 고통 없이, 가장 평온한 상태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호자께 해줄 수 있는 약속은 오직 하나다. 마지막까지 고통 없이 편안한 임종을 돕겠다는 것, 그리고 어떤 결정도 강요하지 않겠다는 것. 마지막 선택은 언제나 보호자의 몫이다. 그 무게는 내가 대신 짊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산부인과가 생명의 시작을 함께한다면, 내과는 그 마무리를 함께한다. 울음으로 시작된 삶은, 고요한 숨으로 끝이 난다. 좋은 마무리란 무엇일까. 아름다운 이별이란 어떤 모습일까. 누군가는 눈물로, 누군가는 침묵 속에서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내 가족이 같은 상황이라면, 나는 과연 그 선택을 담담히 내려놓을 수 있을까? 아무리 의학적으로 회복 가능성이 없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놓아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보호자들에게 그 선택을 권하는 입장이지만, 정작 내가 그 입장이 된다면 과연 마음이 따라줄까. 그 물음 앞에서 나도 여전히 흔들린다.
죽음 앞에서 누군가는 붙잡고, 누군가는 놓아준다. 나는 그 사이에서, 오늘도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열린 문 너머에는, 또 한 사람의 마지막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