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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

고요한 작별을 위한 다섯 계절

by 새벽당직일기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말했다. 인간은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nce).

물론, 모든 이가 이 단계를 순서대로 거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일부를 건너뛰고, 누군가는 반복하며 오랜 시간을 들여 그 감정을 지나간다. 때로는 끝내 수용에 이르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내과 전공의로서 나는, 한 명의 말기 대장암 환자와 함께 이 다섯 걸음을 고스란히 겪은 적이 있다. 그녀는 오랜 시간 병동에서 나와 함께했고, 그 여정 속 감정 하나하나가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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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부정(Denial)
“믿고 싶지 않은 진단, 마음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전이성 대장암 판정을 처음 들었을 때, 그녀는 사색이 되어 말했다.

"선생님, 제가 원래도 변비가 심한 편이에요. 변비나 장염 같은 거 아닐까요?"

나는 CT와 조직검사 결과를 조심스럽게 설명했지만, 그녀는 계속 다른 가능성을 물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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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분노(Anger)
“이해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의 억울함.”

통증이 심해지고 입원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울컥하며 외쳤다.

"왜 나만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 나랑 남편이랑 똑같이 먹고 살았는데, 왜 나만!"

처음엔 당황했지만, 곧 알게 되었다. 그 감정은 삶이 끊어지는 것에 대한 억울함과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분노는 죽음이라는 불가항력 앞에서 나오는 가장 인간적인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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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타협(Bargaining)
“사랑을 걸고 시간을 청하다.”

“선생님, 딸 결혼식이 몇 달 뒤에에요. 그날까지만… 정말 그날까지만 버틸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간절했지만 조용했다. 전이는 이미 뼈로까지 번졌고, 남은 시간은 손바닥 위 모래처럼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그날을 향해 마음을 모으고 있었다. 딸의 드레스, 예식장, 손을 흔들며 웃는 얼굴.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삶의 이유였다.

나는 순간 어떤 대답이 옳은지 알 수 없었다. 설명은 현실을 말해야 했고, 마음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정확한 약속은 어렵지만…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날, 나는 치료의 언어 대신, 기도를 건네듯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시간은 의학이 아닌 사랑으로 연장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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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우울(Depression)
“조용히 스며드는 끝의 그림자.”

치료가 중단된 뒤, 그녀는 말수가 줄고 식사량도 눈에 띄게 감소했다. 창가에 앉아 한참을 침묵하던 날, 내가 조용히 다가가자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워요, 선생님. 자다가 안 깨어날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워요. 그리고… 다 제 탓 같아요. 너무 늦게 병원에 온 것도, 아픈데 참은 것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곁에 앉아, 그녀의 침묵과 두려움을 함께 견디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때로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배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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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수용(Acceptance)
“마침내 도착한 마음의 평온.”

호스피스로 전원하는 날, 그녀는 조용히 짐을 정리하고 간병인에게 미소를 보였다.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간 나에게 그녀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선생님, 수고 많으셨어요. 덕분에 마음의 준비를 잘했어요. 고맙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눈빛은 평온했다. 나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만큼은 의사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진심을 담아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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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걸음은 환자만의 몫이 아니다. 그 감정의 곁에는 늘 말없이 함께 걷는 누군가가 있다.

의사인 나는, 환자의 흔들림을 조용히 지켜보며 배운다. 모든 감정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고, 모든 침묵에는 다다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때로는 설명보다 기다림이, 조언보다 공감이 더 큰 위로가 된다.

어떤 이들은 수용에 이르렀다가도 다시 부정과 분노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환자들은 누구보다 혼란스럽다. 나는 그 마음이 결코 이상하거나 약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다.

그 혼란마저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 그것 또한 환자를 향한 깊은 이해라고 믿는다.

그녀는 결국 호스피스 병동에서 가족과 함께 조용히, 그리고 준비된 모습으로 삶의 마지막을 맞이했다. 누군가의 곁에서 고요한 작별을 도와주는 일. 그 여정의 다섯 걸음을 지켜보며 나는 배운다.

환자의 일련의 감정을 기다려주고 함께하는 것이, 내과의사의 가장 본질적인 덕목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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