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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를 붙잡은 물잔 속 오이와 찻잎

Slow motion ahce and cucumber scene


심층의 감정은 늘 피부의 경계에서 먼저 열린다. 몸이 먼저 알아듣고, 마음은 한참 뒤에 도착하는, 인지적 이해보다 빠른 종류의 감각이다. 그 순서는 언제나 같다. 마음은 너무 늦게 도착한다.


H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는데, 공기가 먼저 그녀를 붙잡아 몸의 모든 신경 끝을 일제히 긴장시켰다.



그 공기에는 찻잎 특유의 서늘한 정밀함이 흩어져 있었다. 마른 잎이 물에 젖기 직전의 금속적 냉기와 투명한 습기가 뒤섞여, 설명할 수 없는 '차가운 정서의 형체'를 만들고 있었다. 그 냉기가 코끝에 닿는 순간,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닿을 곳을 잃은 손처럼, 기억의 표면만 더듬으며 부유하는 손짓이었다.


그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시야 한쪽에서 부엌의 윤곽이 흐릿하게 번졌다.

H가 의도해서 본 것이 아니라—기억이 먼저 시야를 잡아당기는 방식의 스침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 발치에 있던 공기의 냄새를 완전히 이해했다.

식탁 위, 유리컵 한 개가 놓여 있었다. 조용히, 그러나 너무 정확하게 현재의 공기를 지배하는 방식으로.

The cold precision of tea leaves suspended in the air.


반쯤 마시다 흐려진 물. 그 안에 잠겨 있던 으깬 오이 조각.



오이가 물속에 오래 머물렀을 때만 생기는 맑고 초록빛인 냉기, 열리지 않은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희미한 저녁 습기처럼, 조용하게, 그러나 끈질기게 퍼지는 냄새였다.

유리컵은 누군가가 사용하던 방식 그대로 놓여 있었다.

손때가 남은 듯한 미세한 테두리, 비어 있지 않은 기억의 잔향, 공기 속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은 체온의 기척. 그 익명의 '누군가'는 더 이상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데도, 냄새만은 늘 현재형으로 남아 있었다.


마치 그 잔향이 그녀의 호흡보다 먼저 집 안의 시간을 되감는 것처럼.


결핍은 그렇게 들어왔다.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형체를 드러내지도 않고—냄새의 방향으로 먼저 침투했다. 찻잎의 냉기, 오이의 투명한 습기, 유리컵의 미세한 온도. 그 모든 냄새가, 과거의 감정들을 지금의 공기 안으로 되살렸다.

가장 내밀한 감정의 원본은 언제나, 말해지기 전에 이미 냄새로 H에게 건네진다.

몸은 그 냄새의 방향을 읽고, 마음은 그제야 기어 나와 슬픔이 갑자기 찾아왔는지 해석하려 한다.



후각과 기억의 회로는 뇌의 다른 감각들처럼 시상(thalamus)을 거치지 않는다. 냄새 분자는 해마(hippocampus)와 편도체(amygdala)로 곧장 연결된다. 이는 이성의 검열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냄새가 그녀에게 이토록 잔인하게 오래 남는 이유는, 그것이 논리의 문턱을 넘어 기억의 핵심부에 새겨지는, 감정의 가장 원시적인 서명이기 때문이다.




INTERLUDE: 감정이 떠나간 뒤 남는 습기의 기록

상실은 먼저 냄새로 들어와, 마지막에는 습기로 남는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집 안의 공기는 미세하게 구조가 바뀌어 있다.

그 무게감이 조금 물러난 뒤의 공기에는, 극적인 변화는 없다. 울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처럼 분명한 정서의 방향도 없고, 격렬한 감정의 파열음도 없다. 대신 아주 얇게, 눈에 보이지 않는 미완의 층이 하나 더 생긴다.


창문 유리에 맺히지 못하고 사라진 수증기, 바닥까지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머금어진 채 떠다니는 축축한 밀도. 감정이 떠난 자리에 남는 것은 바로 그런 종류의 밀도이다.



얼음 조각이 녹은 유리컵의 물은 어느새 실온으로 돌아와 있다. 오이 조각의 초록빛은 더 이상 선명하지 않고, 향 역시 거의 사라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코를 아주 가까이 가져가면 물 표면 근처에 얇게 남아 있는 냉기가 있다. 한때 차가웠던 감정이 완전히 증발하지 못하고 공기와 물 사이의 경계에 눌어붙어 있는 상태.

상실이 떠났다고 믿고 싶은 순간에, 몸은 이 경계의 냉기를 먼저 감지한다.



Hands caught in mid-air, remembering before the mind arrives.

그날 이후로도 H는 자주 비슷한 습기를 느꼈다. 아무 일도 없는 평일 저녁, 집에 돌아와 코트를 벗고 난 뒤 한 번의 깊은 숨을 들이마셨을 때도—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스쳐 지나간다.


벌써 오래전에 이성적으로는 비워둔 관계, 더 이상 소환하고 싶지 않은 장면, 정리했다고 믿은 감정들. 그 모든 것들이 완전히 떠나간 게 아니라 농도만 낮아진 채로 몸의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그때마다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우울감의 본체는 이미 자리를 옮겼다. 격렬한 파도처럼 밀려오던 감정은 사라지고, 일상의 문장들이 다시 제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습기는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그저 계속해서 스며들 뿐이다.


그래서 때때로 아무 상관없는 장면에서 문득 가슴이 서늘해질 때, 그것은 새로운 애도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예전에 한 번 집 안, 어쩌면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웠던 습기가 다시 차오르고 있다는 경고에 가까웠다.



Old grief rising again, not as memory, but as we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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