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단어가 낯선 감각이 될 때
이 글은 ‘감정이 말을 잃을 때’를 다룬 에피소드입니다.
기억의 파편과 감각의 착란, 그리고 회복되지 않은 말들의 공간 속에서
당신은 자신을 본 적 있나요?
축축한 목요일 아침, H는 모국어를 잃었다.
침묵이 아니라, 말 자체가 사라진 것이었다.
그녀는 노트북을 열고 영어로 타이핑했다.
"Between the past and the present
I am trapped in the same room."
그것은 누구에게도 보내지지 않는 문장이었고,
그를 향한 인사도,
자신을 위한 안부도 아니었다.
전날 밤,
테이블 위에 펼쳐진 낯선 필체의 서류를 본 이후부터
H의 몸은 말보다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잉크는 선명했다. 그 필체는 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서류는 H의 것이었다.
아침 ,
창문을 열던 H는 그제야 깨달았다.
입 안에서 한국어가 미끄러졌고
혀 끝에는 영어 단어만이 붙어 있었다.
그 침묵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설명이 필요 없었다.
단지 그 공간에 떠도는 부재는
작은 상자 안에 담긴 그녀만의 이야기와,
다시 헤집어진 그녀만의 낡은 상처를
화장대 앞에 선
그녀의
창백한 실루엣 앞에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H는 그 남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언제나 그녀의 주변을 흐릿하게 맴도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딘가 오래된 장면이 불쑥, 투과되었다.
그것은 과거의 남자의 그림자였고,
동시에
그녀가 아직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한 시간의 기척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자의 감정인지,
아니면
그 오래전 남자가
지금의 감각을 위장해 되돌아온 것인지.
그녀는 문득,
지금 이 사람에게 느끼는 마음이
정말 '지금'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시간은 겹쳐지고,
감정은 엉켜 있었고,
그녀는 방금 전 웃었던 자신의 얼굴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백색 대리석 세면대는
차갑고 매끄럽게 그녀를 비추고 있었고,
어디선가 날카로운 감각이
그녀의 목을 뚫고 지나갔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Oh god, Am I being too sensitive?”
그 소리의 잔향이
거울 속 어딘가에서 울려퍼졌다.
마치
다른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그녀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
오직,
대리석과 거울,
그리고 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남긴
기이한 침묵만이
화장실 가득 퍼져 있었다.
그날, H는 누구의 감정도 소유하지 않기로 했다.
심지어 자신의 것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