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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는 액자를 응시했다

기억의 액자 속에 갇힌 사람

H는 평소 날짜를 세지 않는다.

그녀는 달력 앞에서도 늘 멍한 얼굴로 숫자들을 지나가게 둔다.

시간은 그녀를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가만히 두고 제멋대로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날짜의 또 다른 해,

또 다른 공간에 있던 H는

늘 그녀의 머릿속에서 영화 속 한 컷처럼 저장되어 있다.

그 기억은 누가 보관해달라고 맡긴 적도 없는데,

하지만 늘 그 자리에 있다. 움직이지 않고, 묻지도 않고.

H는 어느 날, 생각 없이 달력을 봤다.

그 순간, 타이핑을 멈추었다.

흐르고 있던 문장이 끊기고,

그녀는 숫자 사이에 혼자 멈춰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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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는 슬프지도, 화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언제나 그랬듯-

그녀는 멍하니 앉아 액자를 응시했다.

그 액자는 기억이 아니라 장면을 걸어두는 창이었다.


그 액자 안에는 바닷가와 커튼과 그림이 있다.

한때 그 바람이 불어왔고,

그 커튼 너머로 누군가의 얼굴이 있었던 시간이 걸려있다.

H는 그 장면을 그대로 흡수했다.

그것은 그녀가 닿지 못한 누군가였고,

또 누군가가 끝내 닿지 못한 그녀이기도 했다.


언제나 H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다.

기억은 오히려, 그가 아닌 그를 둘러싼 장면만을 남겼다.

남아 있던 건 그 액자를 걸었던 벽의 정적,

그 공간의 온도,

그리고 대화가 끊긴 후에도 흐르던 침묵으로 재생되었다.



액자 안의 또 다른 액자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H는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 조용히 갇혔다.

그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로 선택했다.

그 선택은 고통의 회피가 아니라,

기억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날의 감정은 박제된 것이 아니라,

그녀만의 방식으로 살아남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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