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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는 말 대신 인형을 남겼다

복도에 남겨진 어떤 겨울

어느 기록적인 폭설이 쏟아진 12월,

H는 샤워기 앞에서 얼어붙었다.


머리를 감으려 했지만

샤워기에서는 물 한방울만, 의도 없이 떨어졌다.

그 서늘한 금속성에, 그녀의 발등은 잊었던 계절을 기억했다.


그 날것의 통증은

완전히 잊은 줄 알았던 다른 12월의

같은 자리에 서 있던 H를 데려왔다.


그 12월의 H는

문 밖에 서 있던 그에게

세탁실 안에서 드라이기를 건넸다.

그녀는 말없이 배관에 바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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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공기는 얼음처럼 투명했다.

H는 배관에,

낡은 인형에 테이프를 감고 또 감았고

그 인형은

어설픈 바느질처럼 감겨 있었다.

기억은 그 천의 틈새를 타고, 무음으로 젖어들었다.


그는 말없이 배관문을 닫았다.


H는 가끔 남겨진 인형을 떠올린다.

공간은 바뀌었다.

시간도 바뀌었다.


낡은 아파트 복도에 남겨진

H의 너덜한 인형은

조용히 겨울을 감당할 것이다.


봄의 선명함을 통과하고

여름의 불쾌함을 견뎌낸 채

겨울의 입구에 이르기도 전에,

그 인형은 조용히 찢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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