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멈춰버린 순간에 머무는 것들
우리는 가끔,
스쳐 지나간 한 사람이
마음속에 가장 오래 남는다.
그는 결국 머물지 않았다.
의자에 앉지도 않았고,
손끝도 닿지 않았고,
H는 마치 공연 중 멈춰버린 회색 밀랍인형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지나가던 그 초여름의 잿빛 공기는
그날의 백색 조명,
그날 H가 입고 있었던 리넨셔츠의 까슬한 감촉과
캔버스 백의 끈의 무게와
H도 몰랐던 향수의 느슨한 잔향까지
모두가 그에게 감염되어 있었다.
그 사람은 H에게 무언가를 남기고 간 적 없지만
H는 그 사람에게
한없이 많은 것들을 걸치고 있었다.
눅눅한 비오는 목요일의 주차장에서,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H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
그들은 각자의 목적지로 떠났다.
그게 다였지만,
H는 그날을 아주 오랫동안 기억했다.
다른 금요일 오후
그 날의 복도에 서 있는 H와 그는
정확히 서로를 스쳐지나갔다.
그 복도에는,
단 한 사람을 위해 설계된 것처럼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좋아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상하다’는 말로 시작되던 감정.
이름을 붙이면 사라질 것 같아
애써 농담으로 돌려 말했던 몇 가지.
그가 말한 모든 장난이
사실은 감정이었고,
H가 웃으며 넘긴 모든 말 사이에
감정이 한 겹씩 쌓였다.
H는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
그도 H를 붙잡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정확히 스쳐갔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사랑은 가끔,
스쳐 지나가는 순간으로 시작된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남겨진 마음이
가장 오래가는 걸 H는 알고 있다.
멈춰버린 감정의 흔적은
가끔 귓가에 낡은 녹음 버튼으로 재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