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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는 말하지 않고 걷는다

붉음은 물러지고 백색은 피어난다

당신은 장미를 따라왔지만, 빛바랜 백합이 남았다.





어느 수요일 오후

시장에서 돌아오는 H의 왼손에는 토마토가,

오른손에는 백합 3송이가 들려 있었다.

H의 귓가에 흐르는 트립합은

마치 흐느적거리는 유령처럼

매끄럽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비가 갓 개인 초여름, 가로수들 사이

녹색의 부유하는 공기를 향해

끊임없이 걸었다.

그것이 존재하는 감각이었기 때문이다.


H는 불쑥, 멈춰섰다.

사람들은 느리게 그녀를 스쳐지나갔고,

눈앞에 보이는 놀이터에서

몇 명의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이명만이 그녀의 귀에 스쳐갔다.

H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떠올리지 못한다.

단지 그 사람이 들고 오던 장바구니의 바스락거림,

그 사람에게서 오는 전화의 진동으로 기억한다.


그녀는 그 진동을,

어디선가 울리는 트립합의 베이스 아래 깔리는 저음처럼 느꼈다.

그 사람은 H에게 언제나 자세히 묻지 않았고,

H 역시 그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젠가,
그와 늘상 가던 백화점 지하의 냉면 그릇의 차가움과
버스가 서행할 때 창밖을 가로질러 들어오던 오후 4시의 빛을
같은 층위로 기억했다.

그녀에게 사랑은
언제나 대화보다 공기같았고,
감각보다 무거웠다.


그래서 H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걸었다.
백합의 흔들림과, 토마토 껍질의 질감만이

그녀의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지나간 감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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