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풀어주는 음식들
며칠 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짜증이나 신경 쓰임 정도가 아니라 정말 무거운 상태. 습관대로 일을 벌이며 당장의 기분을 덮어버리려는 나를 발견하고 일부러 연차를 내고 쉬었다.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4일 동안 하필이면 비도 많이 와서, 아주 작정하고 기분을 달라지게 하려는 노력일랑 하나도 하지 않은 채 푹 감정에 빠져 있었다. 찜 해놓았던 프랑스 영화 4편을 보고 그중 하나에 꽂혀서 5번을 연속으로 보기도 했다. 발성이 코에 있는 언어라 부드럽게 느껴져 알맞은 선택이었다.
기분이 안 좋으면 으레 단 음식을 찾지만 단 음식이 통하는 것은 오후 4시의 집중력 저하 상태나 순간의 짜증 정도이다. 아무 해결법도 떠오르지 않는 정도의 무거운 마음에는 계획 없는 휴가나 따뜻한 음식만이 답이다.
어글리 어스에서 초당 옥수수가 왔다. 나는 사실 옥수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팔꿈치까지 흐르는 끈적한 물과 아무리 조심해서 먹어도 이빨 사이에 끼는 걸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초당 옥수수도 누군가 주어서 한번 먹어 본 것을 이후로 일부러 찾아 먹은 적은 없고, 어쩌다 들른 카페에서 초당 옥수수를 사용한 디저트를 한두 번 먹어 본 것이 전부이다.
배달 온 초당 옥수수를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방법으로 먹어봐야겠다 싶었다. 가끔 감자 수프나 옥수수 수프, 양송이 수프 같은 것들이 먹고 싶을 때가 있는데, 이참에 수프를 만들어 먹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겉껍질을 벗기고 힘을 주니 툭- 생각보다 쉽게 반 토막이 났다. 한 알 한 알 떼어서 전자레인지에 3분 정도 돌리니 어마어마하게 단 냄새가 폴폴 나기 시작했다. 옥수수의 단맛을 별로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숟가락이 먼저 움직였고 떠먹어보니 톡톡 터지고 정말 맛있었다. 단맛은 정말이지, 선물이다. 레시피랄 것도 없이 익힌 옥수수를 대충 갈고, 두유를 끓이다가 갈아둔 옥수수를 넣고 섞고, 소금으로 살짝 간하여 순식간에 마무리했다. 아주 곱게 갈아서 크리미하게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초당 옥수수의 매력은 아삭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충 갈았다. 검은콩 두유를 써서 노란빛이 덜 나오긴 했지만 더 구수하고 진한 매력이 있었다.
애니메이션 덕분에 라따뚜이는 이름 정도는 한 번쯤 들어 본 음식이 된 것 같다. 토마토소스를 사용한 밀푀유나베 같기도 한 라따뚜이는 재료의 색감 덕분에 화려해 보이지만 만드는 과정이 단순해서 직접 만들어 먹기에 좋은 음식이다. 시판 토마토소스 특유의 찌릿한 시큼함 때문에 망설여지다가도, 다른 야채에서 우러나온 채즙이 가득 섞여 깊고 든든한 맛으로 변한다는 것을 알기에 부담 없이 사용한다.
그라탕 용 그릇에 토마토소스를 한 층 깔고, 주키니와 가지, 토마토를 일정한 두께로 썰어 순서대로 차곡차곡 쌓았다. 치즈 없이 담백하게 갈까 잠시 생각했지만, 이 날 만큼은 생모차렐라의 부드러움이 필요했다. 켜켜이 쌓아 놓은 야채 위에 생모차렐라를 손 가는 데로 찢어 올렸다. 에어프라이어에서 30분 돌리는 동안 집안에 뜨거운 토마토 냄새가 가득 찼다.
라따뚜이는 투박하고 단순한 맛을 가진, 몸을 제대로 데워주는 음식이다. 한 김 식힌 후에 그릇에 덜어 먹으니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순두부찌개를 먹을 때처럼 뜨거운 한 숟갈을 입에 넣고 혀로 급하게 굴리며 식히기도 했다. 콧물이 살짝 나고 머리 뒤편부터 어깨를 지나 가슴께까지 부드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뭉쳐있던 상반신 근육이 풀리는 것이 해장국이라도 한 사발 먹는 것 같았다. 먹을수록 개운해지는 것이 좋아 탄수화물을 추가하지는 않았다.
정신없이 한 그릇 싹 비운 후에 땀이 맺히고 몸이 풀리면 그제야 ‘이래서 이 음식을 먹고 싶었구나’ 하는 순간이 온다. 매번 특정한 맛의 음식을 미리 생각하고 먹는 나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지만, 이렇게 만나게는 되는 음식에는 감정이 함께 담기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는다는 생각이 들 때 해주고 싶어진다.
옥수수 수프는 헛헛함을 채워주었고, 라따뚜이는 먹는 내내 뜨거움에 정신이 팔리고 먹은 후 개운해지는 러닝메이트 같은 음식이었다. 두 음식 모두 크고 무거운 일을 앞두고 기운을 잃으면 안 될 때, 든든하게 챙겨 먹기 좋은 음식 같다. 기분을 끌어올려 보겠다고 멋진 음식을 해보려다가 모든 게 귀찮아져서 먹고 싶지 않았던 엉뚱한 음식으로 배를 채운 경험이 있다면, 대충 먹는 느낌이 아니면서 과정도 간단한 요리를 몇 가지 알아두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꿀꿀할 수 록 오냐오냐 아기 다루듯이 해주어야 그 상황이 웃겨서 비실비실 웃음이 나오다 기분이 괜찮아지기도 하니까. 살면서 필요하다면 언제든, 뜨끈한 음식으로 기분을 데울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