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풍경 21

친구 1

by 도린

순자야,

잘 지내고 있니?


국민학교 6학년 3반.

새 학기가 시작되면 늘 궁금한 건 새로운 친구, 새로운 선생님이었다. 몇 반에 배정될까 설레기도 했지만, 6학년이 되던 해에는 기대감 없이

5학년 때 그대로, 친구들도 변함없이 같은 반이 되었고 담임 선생님만 바뀌었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2년을 함께 같은 반에서 지내다 보니 우리는 더욱 끈끈한 친구들이 되었다.


지루한 수업시간도 친구들이 있어서 늘 즐거웠다.

그 시절 가장 기대되는 시간은 뭐니 뭐니 해도 점심시간이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등교했지만, 어찌나 배가 쉬이 꺼져 버리는지 1교시나 2교시 때 도시락을 반쯤 까먹는 먹성 좋은 친구들도 있었다.

무말랭이, 볶음 김치, 분홍 소시지, 콩조림, 감자볶음, 계란 프라이, 어묵볶음,

시골 아이들의 도시락 반찬거기서 거기 비슷비슷했지만, 책상을 붙이고 반찬을 나눠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데 우리 반에는 늘 홀로 밥을 먹지 못한 채 앉아 있는 친구가 있었다.


순자!

는 깡마르고 키가 작았다.

촉촉한 큰 눈망울은 늘 슬퍼 보였고, 2년이나 같은 반이었지만 나는 네 목소리를 거의 들어 보지 못했다.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아,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던 너.

그래서였을까.

네가 도시락을 싸 올 형편이 안 돼 점심시간마다 교실 한구석에서 홀로 굶고 있다는 사실을, 5학년 때는 미처 알지 못했어.


어느 날 몇몇 친구들이 머리를 맞댔다.

학급회를 열어 돌아가며 네 몫까지 도시락을 두 개씩 싸 오기로 했어.

도시락을 내밀었을 때 처음엔 멀뚱히 눈만 크게 뜨고 어색해했지만, 이내 까르르 웃으며 우리와 함께 밥을 먹는 사이가 되었지.


너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야산을 일구며 생계를 이어갔고. 밑으로 동생 셋을 할머니가 돌보셨으니, 그야말로 팍팍한 살림이었지.

친구들 몇이 조금씩 돈을 모아 오일장에서 네게 맞는 땡땡이 블라우스를 사고, 남은 돈으로는 동생들을 주려고 썬배과자와 튀긴 어묵을 샀어.


공휴일 점심, 드디어 친구들과 함께 선물 보따리를 들고 네 집을 찾아갔던 날.

돌다리를 건너고 오솔길을 지나 산중턱에 자리한 작은 집. 올망졸망한 동생들이 우리 등에 매달려 좋아했고, 할머니는 뭐라도 주고 싶으셨는지 밀가루를 털어 빵떡을 만들어 주셨어.

설탕도, 베이킹파우더도 없이 소금만 몇 꼬집 넣은 빵떡은 사실 삼키기 힘들 만큼 맛이 없었어.

하지만 우리는 서로 눈짓을 나누며 맛있다며 웃어 보였지.

그 순간 너의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으며 지어 보이던 함박웃음이 아직도 선명해.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대부분은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은 성냥공장으로 갔고. 너도 그곳으로 갔지.


시간이 흘러 나는 대학생이 되었어.

주중엔 캠퍼스 생활을 하고, 주말이면 고향으로 내려오곤 했어.

어느 날, 버스를 타고 내려와 집에 가기 전 염매 시장에 들렀어. 아르바이트해 모은 돈으로 반찬거리를 사려던 참이었지.


야채 가게, 생선 가게를 둘러보다가 맞은편 분식 포장마차에서 낯익은 얼굴을 보았어. 너였어.

쌀쌀한 초겨울, 오돌오돌 떨며 어묵을 먹고 있었지.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던 순간, 눈이 마주쳤어.

하지만 너는 겸연쩍은 듯 눈길을 피하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져 버렸어.


여전히 깡마른 어깨, 가난과 고단함이 묻어나는 모습.

더 다가가지 못하고 망설이는 내 눈앞에서, 너는 그렇게 사라져 갔어.

그날 이후로 머뭇거리지 않고 달려가 반갑게 인사하지 못하고 보내버린 미안함과 후회가 네 뒷모습과 함께 오래 마음에 남았어.


도시락 몇 번 나눠 먹었다고, 혹시라도 내가 알량한 휴머니스트라도 된 양 뻐기며 우쭐해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내 태도가, 나도 모르게 여린 네 마음에 비쳐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까.
뒤늦게 떠오르는 생각에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단다.


순자야,

잘 지내고 있니?


세월이 흘러 우리 모습은 달라졌지만,

내 기억 속 너는 여전히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나눠 먹던 그 소중한 친구로 남아 있단다.

그때 우리가 함께 나눈 도시락, 할머니 손맛이 담긴 빵떡 한 조각,

그 소박한 순간들이 지금도 내 마음 깊은 곳에 따뜻하게 말이야.


혹시 이 글이 너에게 닿는다면, 나는 그저 너의 안부를 묻고 싶다.

그때처럼, 그 순수한 웃음을 되찾아 조용히 내게 말해 주기를.


“응, 나 잘 지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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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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