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욤
구봉산 너머, 굽이굽이 첩첩산중 어딘가에 작은 목화밭이 있었다.
엄마가 괭이와 삽으로 억척스레 일군 산마루의 밭이었다. 주로 목화와 콩을 심었고, 밭 한가운데 고욤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뙤약볕 아래 밭일에 지쳐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면, 그 고욤나무가 유일하게 지친 엄마를 품어 주었다. 가지 아래 앉아 땀을 훔치고 나면, 다시 괭이를 들 힘이 솟았다고 했다. 열매만큼이나 귀한 쉼을 내어주는 그늘이 있었기 때문이다.
맹렬하던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이고, 하늘빛이 유난히 청명해지는 10월이면,
목화나무마다 하얀 솜망울이 팝콘처럼 터져 나왔다.
그 솜을 부지런히 따 담아 머리에 이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내려오던 지금도 눈에 선한 엄마의 뒷모습,
가벼운 솜털이었지만, 태산처럼 부풀어 고단했을 엄마의 어깨.
목화를 이고 진 채 산길을 내려오던 엄마의 뒤를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냥 신났던 어린 나에게도, 구부정한 엄마의 걸음걸이는 태산보다 더 무겁게 다가왔다.
수확을 끝낸 뒤 휑한 밭 너머 굽이치듯 이어진 산들은 까마득히 멀고도 깊었다.
김맬 것도, 거둘 것도 없는 계절이 와도, 엄마와 나는 가끔 산길을 올랐다. 굽이진 길 따라 떨어진 떡갈나무 낙엽 위에 뽀얗게 서려 앉은 찬서리를 밟으며, 청아하고 쨍하게 맑은 공기를 마시며 빈 밭에 들어서면 홀로 텅 빈 밭을 지키던 고욤나무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고욤나무와 엄마와 나 사이 시린 하늘이 맞닿아 있는 듯했다.
엄마와 나는 잎을 다 떨군 채 작은 도토리 같이 앙증맞게 매달려 있는 고욤을 따 광주리 가득 담아왔다.
큰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아 서늘한 곳에 두었다가, 겨우내 간식으로 조금씩 퍼먹었다. 아궁이 앞에 둘러앉아 한 숟가락 입에 넣으면, 입천장에 닿기도 전에 샤베트처럼 사르르 녹아 달콤함이 퍼졌다. 많이 먹으면 다음날 아침, 똥꼬가 막혀 진이 빠질 만큼 고생했지만,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과욕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가래떡을 뽑아온 날에는 따끈한 떡 한 조각에 푹 익은 고욤을 찍어 꿀떡꿀떡 삼켰다. 추위도 잊게 해 주는 겨울철의 귀한 호사였다.
이제는 먹을 것이 흔해져, 그때만큼 귀한 것이 없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뻥 뚫린 듯한 결핍이 남아 있다. 풍족한 지금에도 허전함을 지울 수 없는 이유는, 고욤나무처럼 나를 품어주던 엄마가 이제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억척스레 산밭을 일군 엄마, 굽이진 산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서 있던 고욤나무. 뙤약볕 아래 그늘이 되어 주고, 겨울이면 달콤한 열매를 내어주던 그 고욤나무 한 그루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정물화처럼 선명히 남아 있을 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 나는 한 달 동안 고향에 머물렀다. 어릴 적 다니던 국민학교 교정을 둘러보고, 아홉 봉우리가 이어진 구봉산을 넘으며, 어디쯤이 엄마가 일구던 산밭이었을까 가늠해 보았다. 아득히 펼쳐진 산들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은 알 수 없는 서늘함으로 차올랐다.
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뵙고 돌아와, 소박한 저녁밥상을 물린 뒤, 엄마와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내 어린 시절 이야기, 말 구르마 끌던 인숙이 아버지 이야기, 산밭에서 키우던 목화 이야기, 목화를 타서 따뜻한 이불을 만들던 이야기, 고욤을 숟가락으로 퍼 먹다 변비로 고생한 이야기까지. 고단했지만 웃음이 배어 있던 옛날의 이야기들이 밤새 꽃처럼 피어났다.
서럽고, 그래서 눈부셨다.
그립고, 그래서 행복했다.
고욤나무와 엄마 생각에, 마음 한켠이 따뜻하게 채워졌다.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아득한 산줄기는
휘어진 엄마의 등 같아
아득히 깊어지던 골짝밭에
하얗게 피어오르던 목화
봄빛에 초록옷을 입고
새순의 설렘으로 돋아나
뜨거운 햇살 녹이며
잎새 사이 바람 되어
울 엄마 땀을 씻어주던
그늘진 고욤나무
네가 좋아
친구마냥 네가 좋아
찬서리 맞아 살얼음 든
달콤한 한 알에
겨울밤이 깊어가면
우뚝 서 먼 산 바라보며
목화밭 지키던 너를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