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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을 쓰는 이유

어떤 글쓰기

by 서윤재

어릴 적부터 마음을 터놓는 것이 서툴렀다. 어릴 때는 서툴렀다고 할 수 있는데, 나이가 들어도 그렇다는 것은 서툰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임을 받아들였다. 보통 때의 머릿속은 딴생각으로 끊임없이 흘러갔고, 감정은 요동쳤다. 내 생각과 감정을 조리 있게 말하는 것이 어려워서 사회생활에서는 언제나 손해를 보면서 살았다. 그나마 직장에서는 메일과 메신저로 일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는데, 인간관계에서 언제나 약자였다. 내 생각과 감정은 내 안에서만 또렷했고, 밖으로 나오면 힘을 잃었다. 내 생각과 감정이 안에서 차고 넘쳐 견딜 수 없을 것 같을 때에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되었고, 홀가분해졌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나의 생각과 감정을 꺼내보이기 어려웠지만, 글을 통해서는 마음 속 깊은 진심도 꺼내놓을 수 있었다. 실제로 대화하는 것은 어렵지만, 고치고 고친 글은 내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괜찮은 글이 나올 때까지 글 앞에 앉아서 계속 고칠 시간을 들일 각오가 되어있었다.



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영화감상, 독서, 전시회관람이라고 습관적으로 대답하지만, 사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내 취미는 글쓰기이다. 글쓰기가 취미라고 대답하는 순간 그럼 어떤 글을 쓰는지 질문을 받게 되는데, 그럼 소심하게 '그냥 혼자 끄적거리고 있어요.' 라고 밖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어서 조용히 글쓰기를 하고 있다. 글쓰기는 물감이 필요한 미술이나 악기가 필요한 음악과는 달리 분량이 늘어도 추가 비용이 들지 않는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분량에 따라 비용이 들면, 나는 돈의 눈치를 보게 되어 마음껏 할 수가 없을 텐데, 글쓰기는 단지 내 시간과 집중력을 대가로 한다. 글을 써서 돈을 벌기도 어렵겠지만, 글을 쓰는 데에도 돈이 거의 들지 않아서 다행인 것도 없다.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서 주목받은 적이 없고, 공격만 받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해서 내 사회생활 전략은 주로 은둔술이었다. 어느 조직에서도 존재감 없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잘했고, 보통 이렇게 살면 갈등과 충돌도 없는 대신 기회나 영광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냥 존재하는 사람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진급도, 연봉인상도, 성공도 없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내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이 지구에서 내가 있을 자리, 더 정확히는 내 글이 있을 자리가 필요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꺼내지 못하는 소용돌이 같은 생각과 감정을 정리해 글로 표현하고 싶었다. 이 지구에 나라는 사람도 살고 있다고, 사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야 내가 숨통이 트이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히려 아는 사람들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글을 쓰고 있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



어떤 내용을 글로 써야 할까 고민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들보다 많이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글로 유명해지고, 돈도 벌고 싶은데, 도대체 난 뭘 써야 할까 고민했었다. 글쓰기에 대한 재능은 당연히 없고, 작가로서 다른 사람 앞에 서서 발산할 인간적 매력도 없다.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수도 없다. 그런데 나는 남들보다 정말 많은 것을 시도했었다. 그리고 대부분 실패했다. 운이 좋아서 가끔은 한두개의 성공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데 영향을 더 미친 것은 실패했던 경험들이다. 내가 가진 어떤 것을 내놓아야 한다면 실패경험밖에 없다. 다만 무수한 실패에도 버티는 힘은 조금 아는 것 같아서 나는 이것에 대해 글을 쓰고 싶었다.



작가의 삶을 동경하지만 가난은 두려워서 직장생활을 병행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고소득자도 아닌데다가 직장에서의 연봉이나 진급은 더 나아질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글을 쓰지 않으면 정체가 아니라 정지될 것만 같아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직장이 있다는 것이 자부심이었는데, 직장에서는 더 이상 성장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그런데 글에서는 성장할 여지가 많이 남아있는 것 같아서, 앞으로는 글을 쓰면서 성장하기로 했다. 사실 글쓰기를 시도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 나는 지난 10년간 글쓰기를 수도 없이 도전했고, 그때마다 번번이 포기했다. 블로그를 개설하여 글을 조금씩 올렸던 적도 있지만, 현실에 치일 때면 글쓰기를 가장 먼저 놓아버렸다. 힘든 순간이 오면 글부터 던졌다. 글이 소중하기는 했지만, 생존보다는 아니었나 보다. 매번 글쓰기를 다짐하고 시작할 때마다 이번에는 제대로 해볼 것이라며 다짐했지만, 이렇게 만들어놓고 버린 블로그가 세 개쯤 된다.



직장인 3대 허언 중에 퇴사하고 유튜브 할 거야라는 것이 1위였다는데, 나도 그랬다. 퇴사가 간절한데 회사에 다니는 것 말고는 돈을 벌 줄 몰라서 유튜브를 생각했었다. 유튜브를 시도했던 것은 수익 때문이었는데, 대본을 내가 써서 영상으로 만드는 그런 작업을 했었다. 떡상을 한번 했었고, 악플도 받았다. 유튜브를 한다는 것은 좋은 영상을 제공하고 구독자들과 교류하며 함께 성장할 수도 있지만, 자극적인 썸네일로 눈길을 끌고 악플도 감내하며 돈으로 보상받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생활과 병행하며 영상의 퀄리티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스스로 최저라고 잡은 기준도 만족하지 못하는 영상을 올릴 바에는 그냥 올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만큼의 영상이 뽑히질 않았고, 유튜브에 집중할 만큼현실이 몰아치면 글을 내려놓듯 영상도 내려놓았다. 그래서 버린 유튜브 채널도 세개쯤 된다. 이것도 이미 다 몇 년 전 일이다.



수없이 창작물을 내보이려 했지만 지속하지 못했다. 남들과 다른 길이라도 오래 밀고 나가면 결국 자리를 얻는다는데, 나는 자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번번이 그만두었다. 그렇게 회피하면서 살다 보니 그 시도들은 실패의 영역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한때는 내가 좋아했던 것들이었고, 호기심과 반짝임으로 시작했던 것은 분명해서 나는 그 실패들을 쓰레기통에 넣지 못하고 내 마음속 한 곳에 있는 창고에 고이 모셔두었다. 나는 이것을 실패경험창고라고 부르는데, 글쓰기에 관한 것들을 쓰레기통에 넣지 못하고 실패경험창고에 모아두었다가 글쓰기가 사무치게 그리워졌을 때 다시 글쓰기를 실패경험창고에서 인생실험실로 꺼내오고는 했다.



글쓰기는 실패경험창고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는데, 실패경험창고를 가장 많이 다녀 온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30대 내내 글쓰기를 인생실험실에서 실패경험창고로 수없이 보냈었고, 실패경험창고에서 인생실험실로 수없이 다시 데려왔다. 지금은 현실적인 문제로 인생실험실이 비어있어, 남아있는 것은 글쓰기뿐이다. 글쓰기와 멀어진 동안에는 다른 실패경험이 더 쌓여서 글로 쓰고 싶은 것들이 더 많아졌다. 실패를 겪을 때마다 그것을 마주하지 못하고 실패경험창고에 우선 넣어두었는데, 오래 방치해둔 실패경험창고의 문을 열어 실패경험을 하나씩 꺼내 글로 써보려 한다. 다시는 글쓰기가 실패경험창고로 돌아가지 않도록 내 글을 지켜내는 것이 이번 글쓰기의 목표이다.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책 '빅 매직'에서는 '나는 나의 창작물에게 생계를 책임지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신, 내가 창작물을 책임지기로 했다.'라고 하는 구절이 있다. 나도 오래전부터 같은 다짐을 해왔다. 글에게 나를 책임지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글을 책임지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앞가림도 못하면서 돈을 벌지 못하는 일에 이렇게나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이 옳을까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돈이 궁할 때면, 아르바이트나 투잡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인형 눈 붙이기같은 부업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런 일들은 벌 수 있는 금액이 적어도 보상이 확실해서 나를 자주 유혹에 빠지게 만들었다. 최근까지도 나는 돈이 궁해서 인형 눈 붙이기 같은 부업을 해서 부수입을 벌어볼까 했는데, 그때 나를 바로 잡은 것이 바로 글쓰기였다. 남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따라 해봤지만, 그걸로는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는 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글을 쓴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나는 언젠가 내 글이 있을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다. 내 글에게 돈을 벌어오라고까지는 못하겠지만, 내 글이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열어주기를 바란다.



가끔 외로울 때면, 나는 나 같은 사람하고 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딱 나 정도로만 잘 안 풀리는 사람과 현재 우리가 처한 이 상황에 대해 농담하면서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을 작게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내가 겪고 있는 과정을 이미 지나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과정 속을 여전히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듣고 싶은 목소리를 아직 찾아내지 못해서 내가 그런 글을 쓰기로 했다. 무언가 시작하기가 두려울 때, '그걸 해본 사람이 있대.'라는 말을 들으면 용기가 날 때가 있다. 내 글이 그런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 내 글이 비록 성공기는 아니지만, '그 사람이 해봤대. 망했는데, 괜찮대.' 하는 정도의 글이었으면 좋겠다. 같은 상황을 지나고 있는 사람을 찾아내서 같이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런 이야기를 담은 글을 찾는 일은 그것보다 수월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통해 나와 같은 상황의 사람들을 찾아가고 싶다.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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